'OO 대란'은 없다..채소혁명기지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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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 대란'은 없다..채소혁명기지의 비밀

“그나마 여기는 싼거야”

40도를 웃돌던 폭염도 잦아든 추석연휴 직전 어느 날. 아내와 차례상에 올릴 장을 봤다. 마트에서 채소를 고르는 사람들 표정은 심각했다. 팍팍 오른 야챗값 때문이다. 아내가 시금치 한 단을 들며 말한다.
“그나마 여기는 저렴한 편이야”
4500원이었다. 가격표 옆엔 ‘조기품절 주의’라고 적혀있다. 싸니까 빨리 사 가란 뜻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쳐다만볼 뿐 쉽사리 손을 대지 않았다. 지나가는 한 아주머니께 물어봤다. “시금치 싼데, 왜 안 사세요?”
날 힐끔 쳐다본 아주머니는 기가 찬듯 웃으며 되묻는다.
“아이고, 이게 싸다고요?”

언제까지 이래야 할까?

8월을 넘기며 시금치 한 단은 8000원까지 올랐다고 한다. 1만4500 원에 파는 마트도 있었다. 다른 채소도, 과일도, 사정은 매한가지다.
폭염은 매년 달려드는 침략자다. 올해엔 유독 상처가 깊었다. 하지만 변함없다. 홍수와 폭염을 넘겨 추석 즈음만되면 우리는 '金추' 따위로 제목을 도배한 뉴스에 파묻힌다.

땅에서 크는 채소, '태양을 피하는 방법' 이 없다

사람은 널뛰는 채소 가격 때문에 스트레스다. 따지고 보면 힘든 건 아채도 매한가지일 터.
올 여름, 40도 땡볕에 시달려야 했던 채소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태양을 피하는 방법이, 폭염을 건너 뛸 방도가 있었을까. 상추의 재배 적정온도는 25도다. 15도나 높은 기온에 꼼짝없이 노출됐다는 건 생존이 걸린 문제다.
그저 하늘만 보며, 일기예보를 살피며 땅만 파야 하는 시절은 언제까지 이어져야 할까.
작물에게, 채소에게 ‘혁명’으로 다가올 법한 변화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
우리는 꼭 태양과 흙이 있어야 건강한 채소를 먹을 수 있나.

'기후 스트레스' 안 받는 그들을 찾아서

수소문 끝에 찾아갔다. 일본 교토에 자리한 일본 최대 식물 공장 ‘스프레드(SPREAD)’다. 날로 악화하는 기후 환경을 완벽히 통제한 공간. 작물의 생육 환경은 쾌적했다. 식물이 알맞게 자라는 모든 조건이 갖춰져 있었다. 날씨 대신 데이터가 키우는 제품은 생산량이 일정해 가격도 안정적이다. 행복하게 자란 채소는 소비자도 ‘행복하게’ 만들고 있었다.

공장이 만드는 야채라고 인스턴트를 생각하면 오산이다. 스프레드의 발상은 햇볕과 토양을 단순히 대체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취재진을 안내한 안도 미나코 씨는 “태양과 흙보다 더 나은 조건을 작물 재배에 적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스프레드 가메오카 공장 면적은 2만5000㎡ 규모다. 약 8000평의 실내엔 건강한 녹색 기운을 뽐내는 상추 등 잎채소가 층층이 쌓인 재배 시설에서 자라고 있다. 재배실 온도는 24시간 내내 25℃. 산들바람이 느껴진다. 자연풍에 가까운 에어컨 바람이다. 일렬로 자라는 작물을 따라 만든 패널엔 물이 흐른다. 농약은 일체 배제한 배양액이다. LED 조명은 시시각각 조도를 맞춰준다.
40일. 씨를 뿌려 모종을 옮기고, 재배실에서 길러낸 뒤 트리밍(일종의 가지치기) 과정을 거쳐 포장ㆍ출하하는 데 걸리는 기간이다.
모든 과정은 완벽히 통제된 공간 속에서 이뤄진다. 오카이 요시후미 매니저는 “최적의 재배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일종의 ‘폐쇄공간’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곳이 자연보다 더 나은 환경이라면 작물들은 더 건강하게, 많이 살아남아야 한다. 재배생산률이다. 씨앗 100개를 뿌렸다면 공장에서 자란 채소는 얼마나 생존할까.
“97%입니다” 오카이 매니저의 설명이 이어졌다. “일반적인 (자연에서 자란) 상추의 성공률 70%와 비교하면 높은 편이죠”

"채소가 맛있어야 고기도 맛있다"

이렇게 자라난 채소. 맛은 어떨지 궁금했다. 재배실 앞에 테이블을 놓고 스프레드 공장서 생산한 네 종류 상추 제품을 모두 먹어봤다. 3∼4초가량 씹다보니 단 맛이 느껴진다. 아삭한 식감은 기본.
왜 상추에서 단맛이 났을까. 스프레드 관계자들은 “작물들이 스트레스를 안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채소가 받는 ‘스트레스’의 정체가 궁금했다. 일본 취재를 마치고 돌아와 국내 전문가에게 물어봤다.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시설원예연구소 최수현 연구사의 설명을 들어보자. 왜 상추에서 단맛이 나는걸까? 스트레스를 안 받기 때문. 대체 작물이 받는 스트레스라는 게 뭘까. 한국 농촌진흥청 최수현 연구사의 설명을 들어보자
“작물 생육에 필요한 광(光)파장대가 따로 있어요. 그 파장대를 벗어난 빛을 쪼이면 작물의 스트레스 요인이 됩니다. 이걸 ‘광 스트레스’라고 부르죠 광파장 600∼700나노미터(㎚)가 작물 성장에 가장 적합해요.
식물에겐 수분 스트레스ㆍ건조 스트레스ㆍ양분 스트레스 등등 최적 생육 조건에서 벗어나는 모든 조건이 ‘스트레스’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식물공장 채소가 맛있다는 건 스프레드에서만 확인한 게 아니었다.
7월 11∼13일 도쿄에서 열린 국제시설농업박람회(GPEC)에서도 같은 경험을 했다. 오사카 부립 대학이 내놓은 식물공장 상추였다. ‘버터비어 양상추’와 ‘프릴 양상추’를 직접 먹어봤다. 역시 달콤했다.

대학 부설 식물공장 품질관리부에서 일하는 아유미 엔조지 씨는 “식물공장서 자란 상추는 일반적으로 스트레스를 잘 안 받는다. LED 조명을 쓰다보니 빛 공급도 일정하다. 불필요한 이물질이 안 들어가 쓴맛도 없다”고 말했다.

맛있는 채소는, 다른 음식도 빛낸다. 폭염이 잦아들 줄 모르던 도쿄의 7월 중순. 시원한 냉면 한 그릇이 간절했던 그날도 어떤 사람들은 쌈밥집을 찾았다. 그들은 불판에 고기를 구웠다. 테이블 한켠엔 상추와 깻잎 등 채소가 수북하다. 불에 구운 고기와 신선한 채소의 만남. 더위에 지친 손님들 표정엔 생기가 돈다.
매일 손님을 상대하는 쌈밥 식당 종업원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깨끗하고 맛나는 채소일수록, 그 안에 돌돌 말리는 고기도 더욱 맛있어진다는 사실을.

“야채가 신선해야 고기도 맛있거든요”
(도쿄 신오쿠보 쌈밥 식당의 한국인 종업원 방석민 씨)

NO 스트레스 채소, 가격도 '편안하다'

스트레스 안 받고 자란 채소. 가격은 어떨까. 공장 관계자에게 돌직구를 날렸다. ‘품질이 좋아도 비쌀 것 같다’고.
오카이 매니저는 “상추 한 봉지에 한 뿌리가 들어간다. 스프레드 제품 가격은 198엔 정도다. 소비세 포함 214엔”이라며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모든 비용을 고려해 이 정도 가격이면 승산이 있다고 봤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기업의 말을 100%믿을 순 없다. 모든 정보는 검증이 필요한 법.

일본판 이마트로 불리는 이온(AEON) 교토점엔 우리가 돌아봤던 그 식물공장 제품이 진열돼 있었다. 가격은 소비세를 합쳐 170엔. 우리 돈 1700원 수준이었다. 오히려 공장 출하 가격보다 저렴했다. 바로 옆에 놓인 일반 재배 상추와 비슷한 값이었다. 더 비싼 제품도 눈에 띄었다. 현지 물가정보 업체에 따르면 이 시기 일본 대도시 상추 가격은 최고 300엔을 기록했다.

오카이 씨 설명은 거짓이 아니었다. 스프레드가 소비자를 등지겠다 마음먹지 않는 한, 제품 값이 오를 가능성은 거의 없는 셈이다. 이온과 비슷한 규모인 다른 일본 대형마트 고위 관계자도 취재진과 만나 “식물 공장 재배 야채는 판매가 변동이 없기때문에 소비자들이 선호한다”고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그럼 식물 공장이 아닌, 밖에서 자란 ‘노지 재배 채소’ 상황은 어떨까. 아래 화면을 보자.

2018년 7월 13일 오후 6시. 닛폰TV ‘뉴스에브리’는 폭염에 시달린 작물 가격이 폭등했단 소식을 전했다. 도쿄 어느 슈퍼 채소 값은 2주일 새 약 1000원(100엔)이 올랐다. 각지 야채에 ‘이변’이 생겼단 뉴스는 덤. 뉴스에브리는 “기온이 높아 일부 작물이 뒤틀리는 등 변형이 일어났다”는 농부의 한숨섞인 목소리도 내보냈다. 이날 도쿄 지역 낮기온은 39도를 기록했다.

소비자 "값싸고 품질 좋아서 골랐다"

이처럼, 식물공장서 생산된 채소가 ‘잘 나가고 있는’ 현상은 교토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열도 전역에 걸쳐 공장 채소에 대한 호감도는 점점 높아만 간다. 최적의 생육 조건서 자라난 식재료를 변하지 않는 가격에 먹을 수 있어서다. 변덕스러운 하늘만 쳐다볼 이유가 없어지는 게 자연스럽다.

일본 농림수산성은 재무성 특수법인 ‘일본정책금융공고(JFC)’와 함께 주기적으로 식물 공장 재배 야채와 노지 재배(일반 토지와 태양 아래서 키운) 야채에 대한 일본 전국 소비자 반응을 체크해 왔다.
헤럴드경제가 제공받은 동향조사(지난 1월 실시) 데이터에 따르면 공장 채소 호감도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마트에 나란히 진열된 공장 채소와 노지 재배 채소 가운데 “식물 공장 제품 값이 노지 채소 가격과 같거나, 공장 채소가 조금 더 비싸도 구입할 것”이라고 응답한 소비자는 42.7%였다. 10명 중 4명이 ‘같은 값이면 공장 채소를 사 먹겠다’고 반응한 것. 이 비율은 2009년 31.2% 에서 2012년 38.6% → 2018년 42.7%로 9년 새 11.5%P(포인트) 증가했다.
반면 식물공장서 재배된 채소는 ‘안 산다’고 답한 소비자는 9년 전 21.3%에서 올해 16.3%로 줄고 있는 추세다.

식물 공장 채소의 이미지도 좋아지고 있다. 10명 중 7명이 넘는 소비자(73.5%)가 식물 공장에서 재배되는 야채가 노지 재배 제품과 거의 차이가 없거나 ‘공장 채소’ 품질이 더 좋다고 응답했다.
주목할 부분은 동일본 대지진(2011년) 이전인 2009년에도 이같은 반응에 큰 차이가 없었단 점이다. 노지 채소보다 공장 채소가 더 좋다는 이미지는 일본인 대부분이 경험한 ‘자연재해’와 큰 관계 없이 꾸준히 좋아졌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공장 채소가 더 좋은 이유로 소비자들은 일반 채소와 비교해 ‘안전하고, 고급스러우며, 친환경적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호감도와 이미지는 ‘구매→재구매’로 이어진다. 공장 야채에 손을 댄 소비자 가운데 절반 가까운 48.8%는 “매월 2회 이상 공장 야채를 사 먹는다”고 답했다.
실제 일본 대도시 마트엔 식물 공장 야채와 노지 재배 야채가 같은 위치에 진열돼 있는 모습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그만큼 손님들이 많이, 자주 찾고 있단 뜻이다.

스프레드, 어떻게 성공했을까?

핵심은 규모의 경제다. 많이 생산하고 많이 팔지만 제품 당 이윤은 적게 남기는 ‘박리다매’다.
스프레드의 안도 씨는 “하루에 상추 2만1000포기를 생산-출하한다. 이 물량은 매일 일본 전역 2400개 점포에 공급한다”며 “초기 설립 시점부터 공장을 크게 지어 대량생산을 추구했다”고 말했다. ‘규모의 경제’는 일본서 활약 중인 식물공장 기업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전략이다. 취재진이 GPEC 박람회에서 만난 시설재배 관계자들이 한목소리로 꼽은 성공비결이기도 하다.

또 다른 성공 비결은 물류 혁신이다. 스프레드는 2002년 자체 유통회사를 세웠다. 이를 통해 공급 단계를 일원화ㆍ단순화 했다. 스프레드의 물류 계열사가 움직이는 자사 제품량은 매일 700톤이다. 공급되는 물량이 언제나 일정하다. 가격이 크게 오를 일도, 내릴 이유도 없는 것이다. 적어도 스프레드 같은 식물공장 제품 앞에서 ‘OO대란’ 따위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본 정부도 한몫 했다

일본 농림수산성에 따르면 3월 현재 스프레드와 같은 형태의 식물공장은 182곳이다. 스프레드만 ‘잘 나가고’ 있는 게 아니다. 최근 일본 식물 공장 산업은 채산성 악화에 따른 오랜 적자 상태를 벗어나 다시금 기지개를 펴고 있다.
여기엔 일본 정부의 지원책도 크게 기여했다. 우선 공장 설립의 규제 문턱을 확 낮춰 세금을 줄여줬다.

일본서 농업용 토지에 매기는 세금은 일반용지 1000분의 1 수준이다. 정부는 두 차례 법 개정을 통해 식물공장을 짓는 땅도 농업용지로 인정했다.
도쿄에서 만난 시미즈 하루야 농림수산성 과장보좌(사무관 급)는 “2016년 농업진흥지역정비법을 개정했다. 땅을 갈아 농사만 지어야 했던 농업용지도 식물공장 설립을 가능케 했다. 아예 법조문에 ‘식물 공장’이란 단어를 명시했다”고 말했다.
아울러 “나아가 최근엔 농작물을 생산만 하고 있어도 농지가 될 수 있게끔 관련 법을 제정했다”고 설명했다.
‘교통정리’에도 힘썼다. B2B(기업 간 거래) 분야의 경우 식물 공장 작물과 노지 작물 판매 시장을 분리했다. 하루야 보좌는 “식물 공장은 시장 개척 단계부터 사전 계약처를 확정해야만 정부 ‘수혈’을 받도록 했다. 소규모 일반농가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NO스트레스 채소', 이제는 수출이다

일본 정부는 식물 공장의 수출 활성화에도 신경 쓰고 있다. 판로를 더욱 넓혀주는 ‘간접지원’이다. 하루야 과장보좌의 설명이다.
"일본 식물공장 메이커들이 이미 해외에 진출하고 있어요. 특히 물이 없는 나라, 아랍지역 등 신선야채 섭취가 어려운 곳으로 많이 가죠. 한랭지역 러시아에도 식물공장 수요는 상당합니다.
정부로선 직접 자금 지원은 하지 않지만 측면 지원은 하고 있죠. 아랍 국가의 경우엔 아베 총리나 고위관료들이 출장을 갈 때 기업관계자를 대동해 PR하거나 한 적이 있어요. 러시아와 경제 협력 논의를 할 때도 일본 정부가 주목하는 부분이 식물공장입니다."

윤현종 기자 factism@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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