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에 이우환이 있다면 조각엔 심문섭이 있다”, “100년 뒤에도 살아남을 작가”로 꼽히는 조각가 심문섭(68). 그는 요즘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세계를 바삐 누빈다. 전시도 해외 전시가 훨씬 많다. 지난해 11월 베이징의 원전(元典)미술관에서 대규모 개인전(1월 25일까지)을 개막했는가 하면, 오는 5월에는 파리에서 그간 제작한 사진작품만을 모아 개인전을 갖는 등 해외전시가 끊이질 않는다.
‘The Presentation’이라는 부제의 전시에는 실생활에 쓰이던 가구를 재활용한 작품이 여럿이다. 그가 1980~90년대 시도해 국내외에서 크게 인기를 모았던 ‘목신(木神)’시리즈에서 두세 발짝 더 나아가,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허문 작업들이다.
재개발로 헐린 베이징 가옥들의 대들보며 기둥은 그를 만나 새로운 예술적 생명을 얻었다. 목(木)전주 모양의 대형기둥 18개를 일렬로 세운 작업이 대표적인 예. 그런데 그중 1개의 기둥에는 아뿔싸, 바퀴가 달려 있다. 꼼짝도 안 할 것 같은 육중한 나무기둥들이 이 바퀴 때문에 움직임을 품고 있다. ‘질서 속 자유’라고나 할까. 눈 밝은 이가 아니면 발견하지 못할 파격. 도자기를 빚으며 연적의 한 귀를 살짝 비틀었던 우리 선조들의 그 파격을 떠올리게 하는, 절묘한 ‘변주’다.
한약방의 약장처럼 목재로 대형 구조물을 만들고, 검게 옻칠을 해 낯선 성채를 만들기도 했다. 그리곤 그 거대한 성채를 물이 담긴 그릇들 위에 올려놓아 아이러니를 뿜어낸다. 집채만한 성채가 마치 배처럼 움직이는 듯하다. 가히 심문섭다운 표현이다. “인간이 쌓은 구축물의 역사를 내 나름대로 조망해봤어요. 획일적인 현대의 도시풍경을 슬쩍 틀어서. 그것들도 결국은 어딘가로 흘러가는 게 아닐까...”
그런가 하면 네온, 철망, 비닐, 대나무 등 공기와 바람이 통하는 가벼운 재료를 끌어들인 작업도 있다. 대나무 새장을 켜켜이 쌓아올린 설치작품은 더없이 거대하고 어둡지만 바람과 소리가 자유롭게 이쪽 저쪽을 넘나든다. 초록빛의 가는 네온 불빛은 새장 사이에서 수직으로 끝없이 빛을 발하며 관객의 시선을 잡아끈다.
이질적인 소재들이 만나 새로운 충돌을 보여주는 작품도 나왔다. 배처럼 누워 있는 나무기둥에 대나무가 꽂혀 있고, 나무덩어리는 검은 무쇠와 만나 묘한 울림을 전해준다. 신문지 뭉치와 돌을 한 덩어리로 묶은 광섬유가 어둠 속에서 빛을 내고, 커다란 바위 사이 구멍에선 찰랑찰랑 물이 흐른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소재에 대한 해석과,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공간 주변에서 일어나는 풍경들을 시(詩)적으로 환기시키고 있다. 인공과 자연을 무시로, 가뿐히 오가는 것. 물성과 장소가 갖는 시간과 역사, 그리고 문화를 함께 녹여내 ‘상상이 살아 숨쉬는 세계’로 밀고 나간 게 심문섭의 작업이다. “쓰였던 나무엔 시간과 문화가 묻어 있게 마련이지. 오브제, 즉 물질 스스로가 얘기를 하거든. 내가 최대한 덜 개입돼 그것들이 말을 하게 하는 거야.” 이렇듯 자연의 핵심적 요소인 나무, 물, 하늘 등을 그대로 차용해 자연을 다시 한 번 바라보게 하는 것이 심문섭 작업의 핵심이다. 그 열린 시도는 그의 ‘시 조각’을 더욱 풍부하게 한다.
최근들어 그의 근작들은 전통적인 조각이라기 보다, 설치작업이나 개념미술에 더 가까와지고 있다. 미술평론가 김복기 씨(월간 아트인컬쳐 발행인)는 "이제 심문섭은 하나의 작품 덩어리뿐만 아니라 작품이 놓인 공간, 그 안의 공기, 빛과 그림자, 관객의 시선까지도 작품의 구성요소로 끌어들인다"며 "자연을 작품화한 것이요, 작품을 자연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연이 작품을 제압하지 않고, 작품이 자연을 제압하지 않는다. 자연과 예술이 둘 다 ‘스스로(自) 그러한(然)’ 조화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고 평했다.
서울대 조소과 재학시절부터 두각을 보였던 심문섭은 국전 문공부장관상, 국전 국회의장상, 김세중 조각상, 프랑스 정부의 문화예술공로 슈발리에 훈장 등 상복도 많은 편이다. 또 한국 조각의 세계화를 이끌어온 리더답게 파리, 상파울루, 시드니, 카뉴, 베니스 등 국제 비엔날레에 연이어 참가했으며, 각종 국제 조각 심포지엄에도 한국 대표로 참여해왔다. 2007년에는 프랑스 문화성 초청으로 파리 루브르박물관 옆 팔레 루아얄 공원에서 개인전을 갖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조각이라기엔 너무나 자연에 가깝고, 자연물로 보기엔 너무나 조형적이다. 바로 그 점이 해외로부터 호평받는 요소다. 프랑스 문화성 국장을 역임한 올리비아 케플랜은 “그동안 세계는 미국, 영국, 독일 등 서양 미술에만 주목해왔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놓치고 있는 중요한 것을 심문섭은 보여주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
지난 2008년 중앙대 교수직을 퇴임한 뒤 세계를 유랑자처럼 누비며 더 왕성하게 활동 중인 심문섭은 “국제미술은 전쟁터다. 스스로를 벼랑 끝까지 내몰지 않으면 안 된다. 게다가 내겐 시간도 많이 남아있지 않다”며 오늘도 예술에의 새로운 항해를 위해 또다시 돛을 드리우고 있다.
글=이영란 기자/yrlee@heraldcorp.com, [사진제공=갤러리 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