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로 맞춰진 체온계
미국에선 제품결함 오해
아무리 품질좋은 제품도
현지 시장 규격에 맞아야
우리나라의 미국 수출 상품 추이를 살펴보면 최근에는 IT산업의 비약적 발전에 힘입어 IT 기반의 융복합 전기전자제품 수출이 빠르게 늘고 있다. 이처럼 우리의 수출 상품은 과거 범용제품 위주에서 고도화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비즈니스 현장에선 우리 기업들이 미국 시장의 기술 표준이나 비즈니스 관행을 충분히 숙지하지 못해 귀중한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실례를 몇 가지 들어본다. 몇 년 전 신종 플루가 대유행할 당시 미국에선 공항은 물론 기업과 가정 등에서 이상 고열을 감지할 수 있는 전자체온계가 큰 인기를 끌었다. 정상체온 이상이 되면 경고 표시가 나타나는 체온계다.
그런데 우리나라 제품은 통상 정상체온이 36.5℃에 맞춰져 미국 시장에선 팔 수가 없다. 미국에서 정상체온은 98.6℉, 섭씨로 환산하면 37도가 되기 때문이다. 즉, 미국에선 정상체온의 미국인이 한국산 전자체온계로 측정하면 경고 표시가 나타나고, 이는 제품 결함으로 오해받을 수 있어 바이어 입장에선 수입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전기전자 및 기계류 품목의 중간재 또는 부품은 더욱 정확한 제품 사양과 표준이 요구되므로, 이를 충족하지 못하면 상담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우리의 차세대 주력 수출제품 중 하나인 LED 전구의 경우 현지에 맞는 전구 크기를 개발하지 않으면 바이어와 상담이 어렵다. 다른 전기제품 역시 우리와 주파수 차이가 나 전파 파장의 불일치로 인해 기존 제품과 호환되지 않아 현지 진출에 제약을 받을 수가 있다.
국내에서 개발된 제품이 아무리 품질이 좋고 디자인이 우수해도 현지 시장이 요구하는 규격과 표준에 맞지 않으면 관심을 끌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현지 바이어들에게는 성의가 없거나 최소한의 준비도 하지 않은 것으로 비쳐져 오히려 손해를 볼 수도 있다.
바이어에게 제시하는 영문 제안서(Proposal) 또한 바이어의 구미에 맞게 세련되고 이해하기 쉽게 작성해야 한다. 현지 미국 기업들이 작성한 제안서를 보면 대부분 3~4장을 넘지 않는다. 제품의 장점과 타사 제품과의 비교 분석, 왜 자사 제품을 구매해야 하는지 등의 이유가 매우 간결하면서도 세련되게 표현돼 있다. 제품 설명 말고 일반 현황이나 기술 부문은 부가적으로 간략히 소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반면 우리 중소기업들이 작성한 제안서를 보면 본사와 공장 현황에 대한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는 경우가 적잖다. 기술 부문에 대해선 필요 이상의 복잡한 자료를 포함시키는 것이 대부분이다. 정작 바이어가 보고 싶어 하는 제품의 장점 등은 마지막 페이지에 간략히 소개돼 주객이 전도된 느낌을 주는 제안서도 허다하다.
현지 바이어들은 제품 자체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회사와 기술 소개 부문은 대충 넘어가고 제품 부문을 가장 관심 있게 살펴본다. 바이어가 부실한 자료에 실망하거나 제품에 대한 추가 자료를 요청해 제안서를 다시 작성하게 되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바이어와 멀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했다. 우리 수출기업의 내부적 역량을 키워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미국 현지 제품 규격과 바이어들의 비즈니스 관행을 정확히 파악하고 대응해 나가는 것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