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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떤 인생인들 사연이 없으리" 손정희의 ‘Adjustments’전
저음의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오는 갤러리 2층의 두터운 장막을 걷고, 전시장에 들어서면 온통 거미줄 세상이다. 곳곳에 설치된 조명을 받아 거미줄은 아름답고도 처연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여인의 신음소리, ‘쿵쿵’ 심장박동 같은 배경음을 음미하며 발길을 옮기면 아, 공중에 매달려 거미줄을 잣고 있는 거미여인이 보인다. 그리스신화 속 ‘아라크네(Arachne)’다.

서울 평창동의 갤러리세줄(대표 성주영)에서 지난달 30일 개인전을 개막한 손정희 작가는 고대신화의 아라크네 이야기를 한점의 대형 공간설치작업으로 완성했다. 작품의 명제는 ‘아라크네’, 곧 ‘거미’다. 아테네 여신(女神)과 베짜는 솜씨를 겨루다 너무 출중한 실력을 뽐낸 나머지 여신의 노여움을 사 평생 거미줄을 잣는 끔찍한 천형을 받은 아라크네를 손정희는 그만의 해석으로 드라마틱하게 표현했다. 거미 여인을 자신만의 내밀한 공간에서 끝없이 실을 잣는 당당한 존재로 빚어낸 것. 거미로서의 삶을 받아들이며 삶을 영위하는 존재로 재해석한 셈이다. 따라서 관람객은 여인의 사적 공간을 잠시 침범(?)한 존재가 된다.


대작 ‘아라크네’에서 드러났듯 손정희 작가는 두번째 개인전의 테마를 ‘적응’을 뜻하는 ‘Adjustments’로 잡았다. 그리곤 한국의 고대설화라든가 그리스신화 속 인물을 독특한 시각으로 흥미롭게 변주해냈다.

기실 ‘아라크네’ 이야기는 여러 작가에 의해 작품화됐다. 16세기 화가 틴토레토(Tintoretto)를 필두로 이 신화를 다룬 작가는 여럿이다. 손정희 작가 또한 이 신화에 매료됐지만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이를 풀어내 주목된다. 즉 아라크네가 거미여인이 되고 난 ‘이후의 삶’에 촛점을 맞춰, 그 처연하나 한편으론 그 상황까지 즐기는 존재임을 우리 앞에 매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손정희의 거미여인은 아슬아슬한 포즈로 공중에 매달려 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득의만만한 표정이다. 슬픔을 삭혀 모든 걸 초탈했는지 눈은 요염하기까지 하다. 작가는 이 대형 도자조각을 만들기 위해 신체를 여러 부위로 나눠 4,5회이상 굽고 또 구웠다. 유약도 수없이 칠했다. 또 굵고 가는 실을 일일이 꼬아 긴 거미줄을 만들어 거미여인의 온전한 공간을 만들어냈다. 


이처럼 흙을 빚어 기묘한 인체 형상을 만드는 조각가 손정희는 이번 개인전에서 삶을 살아가며 상황에 적응해나가는 인간, 특히 여성 존재를 집중적으로 천착했다. 포세이돈과 사랑을 나누다 여신의 저주로 머리카락이 온통 꿈틀거리는 뱀이 된 ‘메두사(Medusa)’도 형상화했다. 손정희는 끔찍한 괴물로 변한 메두사가 그같은 상황에서도 여인의 감성을 잃지않으려는 내면을 표현했다.

한 남자를 끔직히 사랑한 나머지 그 남자와 일심동체가 돼버린 여자 ‘Hermaphrodite(암수한몸)’는 더 이상 육체적 욕정이 필요 없는 존재로 탄생했다. 그러나 아무도 필요 없기에 오히려 누군가를 더 그리워 하지 않겠느냐고 작가는 반문한다.

또 사랑의 화살을 쏘는 귀여운 존재인 큐피트는 손정희에 의해 늙은 배불뚝이 아저씨로 전락(?)했다. 등에 작은 날개가 달리긴 했지만 머리에 뿔까지 달린 ‘팍삭 삭은’ 큐피트는 지나가버린 사랑, 설렘이 사라진 사랑을 은유한다. 작가는 한국 설화도 작품화했다. 100일 동안 마늘만 먹어 인간이 된 웅녀. 그러나 어쩌면 곰 시절이 더 좋지 않았을까 하고 의문부호를 던지고 있다.

손 작가는 이처럼 고대신화라든가 동화, 우화 속 인물을 오늘의 세계와 인간존재에 대입시켜 새롭고 유쾌하게 해석해낸다. 특히 이번에는 그 신화 속 이야기가 끝난 후의 삶, 극적 사건을 겪은 존재들이 그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빚어내 관심을 모은다.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부문에 앵글을 맞춘 그 신선한 발상과, 이를 입체로 자유자재로 빚어낸 표현력은 단연 돋보인다. 때로는 유머러스하고, 때로는 시니컬하며, 때로는 기이한 그의 작업은 도예 조각의 신세계를 우리 앞에 흥미롭게 펼쳐보인다. 


손정희의 작업과정은 꽤나 복잡하다. 공력도 많이 든다. 흙으로 역동적인 인체형상을 만든 다음, 유약을 바르고 이를 가마에 최소 세 차례 이상 굽는 힘든 과정을 거친다. 때로는 도자기 조각 위에 헝겊, 실타래 등의 소재를 곁들여 보다 풍부한 질감을 살리기도 한다. 이렇듯 국내 여타 작가들이 거의 시도하지 않는 색다른 도예 조각에 도전하는 그는 흙과 불에 의해 작업이 어떻게 변형돼 나올지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매 작업에 임한다. 데뷔 초에는 그 긴장감 때문에 숨이 막힐 듯 했으나 이제는 그 긴박감마저도 조금씩 즐기게 됐다. 그 결과 한결 탄탄한 밀도와 완결성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 버나드칼리지에서 예술사를 전공한 뒤 홍익대 대학원을 졸업한 손 작가는 대한민국 해군을 창설하고 초대사령관을 지냈던 손원일 제독의 손녀이자, 한나라당 홍정욱 의원의 부인이다. 어린 세 자녀를 키우며 까다로운 도예 조각의 길을 걷는 투혼을 보이고 있다. 전시는 10월 31일까지. 02)391-9171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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