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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환기 딸 금자씨 "유족은 작품 별로 갖고있지 못하죠"
"아, 전시장에 걸린 아버지 작품들을 보니 정말 좋네요. 새로운 작업에 전력투구하기 위해 서울 생활을 마다하고, 뉴욕의 좁은 아틀리에에서 저 많은 점들을 일일이 손으로 찍으셨다니 얼마나 힘드셨을까, 얼마나 외로우셨을까요? 사람들은 수만개의 푸른 점이 찍힌 아버지 그림이 감동적이라고 환호하지만 저는 가슴이 아픕니다"

한국 근현대미술계에 ‘추상’이라는 세계를 활짝 열어젖힌 고 김환기 화백(1913~1974)의 둘째딸인 김금자 씨는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 내걸린 부친의 대작 회화들을 보며 감격에 겨워 했다. 



그는 "저도 아버지의 이렇게 큰 작품을 갖고 싶어요. 그런데 본격적인 작업은 한점도 못갖고 있어요. 그저 작은 과슈 작품 정도죠"라고 밝혔다. 실제로 미술계에선 ’좋은 작가는 유족들이 작품을 별로 갖고 있지 못하고, 평범한 작가는 유족들이 작품을 대부분 보유하고 있다’는 말이 전해진다. 김환기 화백의 경우도 마찬가지인 셈.

김경자 씨는 "아버지께서는 하루 16시간씩 작업을 하셨어요. 주무시는 시간 빼고는 온종일 그림을 그리신 셈이지요. 한 여름에는 런닝셔츠 바람으로 더위를 쫓으며 화폭에 매달리셨죠.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라고 회고했다.


김 씨는 부친이 조선시대 백자를 비롯해, 도자기와 조선목기 등 우리의 문화유산에 관심이 많았다고 밝혔다. 당시만 해도 도자기와 목기를 눈여겨보고 이를 수집하는 사람이 드물어 가격이 요즘처럼 비싸지 않았다는 그는 "우리 가족은 성북동에서 살았는데 담이 제대로 없었죠. 아버지는 길가 유리창이 있는 방에서 작업하셨는데 유리창 바로 밑에 가장 좋은 백자들을 쭈욱 올려놓곤 하셨어요. 아마도 아름다운 우리 도자기들을 오가는 사람들이 많이 좀 감상하라고 그러신 듯해요"라고 말했다. 자신이 수집하긴 했지만 보다 많은 이들과 한국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공유하고 싶어 하셨다는 것. 그림 속에 도자기가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라고 설명했다.


부친의 별명을 묻자 "아버지는 키가 육척이셨어요. 180cm가 넘으셨을 거에요. 그래서 키와 관련된 별명이 많으셨죠. ’꺽다리’ 뭐 그런 거요. 그 키를 좀 닮았어야 하는데.. 아, 닮은 거 있네요. 아버지의 까무잡잡한 피부를 닮았죠. 아쉽게도 좋은 건 못 닮고.."라며 환하게 웃었다.

글.사진=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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