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만의 고유한 의식이 복기다. 피 말리는 대국이 끝나면 쓰러질 지경인데도 기사들은 뒀던 한 수 한 수를 다시 놓으며 어디서 승패가 갈렸는지 짚어본다. 특히 패자가 된 날의 복기는 몇 곱절 더 힘들다. 조훈현은 저서 ‘고수의 생각법’에서 “패자가 된 날의 복기는 마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과 같다. 그러나 아파도 뚫어지게 바라봐야 한다. 패배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는 준비를 만들어 준다”고 했다.
한국 여자 배드민턴 간판 안세영도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과정’을 마주하는 용기로 한 단계 도약했다. “그전에는 내가 패한 경기 동영상은 찾아보지 않았다. 자책이 심한 성격이라 자신감을 잃어버릴까 봐.... 막상 영상을 보고 나니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더라.” 그는 체력의 효율적 분배와 공격 타이밍 선점에서 답을 찾았다. ‘대각 스매싱’ 같은 전매특허기술도 장착했다. 안세영은 마침내 난적 야마구치 아카네(일본·세계 1위)와 천적 천위페이(중국·도쿄올림픽 금메달)를 차례로 넘어 올해 인도오픈에서 시즌 첫 우승을 따냈고 인도네시아 마스터스에서도 정상에 섰다.
70년 역사의 더불어민주당은 1987년 민주화 체재 이후 김대중(DJ), 노무현, 문재인 세 명의 대통령을 냈다. 대선 4수 끝에 50년 만에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룬 DJ와 질려야 질 수 없는 2012년 대선에서 패배했던 문재인은 ‘아파도 뚫어지게 바라보는’ 복기의 힘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DJ는 가족만 빼고 모든 것을 다 바꾸겠다는 ‘뉴 DJ 플랜’으로 거듭났다. 호남·대학생·노동자·농민 등 기존의 지지세력만으로는 절대로 대권을 잡을 수 없다는 자성에 따른 것이다. 중도뿐만 아니라 보수세력까지 품는 ‘DJT(김대중·김종필·박태준) 전략’이 탄생한 배경이다. 문재인도 대선 패배 후 참회록 격인 ‘1219 끝이 시작이다’는 책을 내고 “우리 안의 근본주의를 타파해야 한다”며 중도층과 합리적 보수에 한 걸음 더 다가가기 위한 전략을 세웠다. ‘보수 책사’로 불리는 윤여준을 국민통합위원장으로, 박근혜 정부의 장자방 김종인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영입하는 파격으로 지지층 외연을 넓힐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재명의 민주당’은 지금 무엇을 복기해야 할까? 20년 집권을 큰소리치다 5년 만에 정권을 빼앗겼다면 더 크게 반성하고 더 크게 혁신했어야 했는데 패장에 훈장(1600만표 득표, 역대 최소 0.73% 격차)을 달아주며 당대표로 올렸다. ‘사법 리스크’를 애써 외면한 채. 이제는 뭘 해도 이재명 방탄 프레임에 갇혀 민심에 닿지 않는다. 두 대통령(이명박·박근혜)을 감옥에 보낸 윤석열 정부 최정예 검사들이 사활을 걸고 이 대표 기소에 나서면서 점차 벼랑 끝으로 몰리는 처지다. 대장동·백현동 개발, 성남FC, 쌍방울 대북 송금, 선거법 위반 혐의 등 검찰의 동시다발적 기소 가운데 하나만 유죄 판결이 나도 정치생명을 잃을 판이다. “정치 탄압, 정적 제거”라는 이 대표의 외침보다 정당한 수사라는 여론이 커져만 간다.
이대로 가면 내년 총선에서 필패다. 여당은 ‘이재명 수호’가 내년 총선까지 이어지기를 속으로 기도 중이다. 민주당은 ‘조국 수호’가 가져다준 정치적 재앙을 곱씹어봐야 한다.
사즉생(死則生)의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