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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홍 칼럼] 12·12-5·18, ‘하나회 내란’과 언론학살

1979년 12월12일 밤 10시반 서울 필동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장태완 소장이 작전참모 박동원 대령에게 작전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전차대대 병력과 화포 장비를 모두 사령부로 집결시키라. 야포단의 모든 포는 경복궁 30경비단을 목표로 잡도록 작전지시를 하달하라.”

군사반란의 지휘소였던 30경비단에 6시부터 하나회와 그 후원 장성들이 모여들었다. 밤 9시 쯤 전체 윤곽이 드러난 그들의 명단을 수경사 참모장 김기택 준장이 메모지에 적어 장 사령관에게 보고했다. “1군단장 황영시 중장, 수도군단장 차규헌 중장,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중장,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 9사단장 노태우 소장, 20사단장 박준병 소장, 71방어사단장 백운택 준장, 1공수여단장 박희도 준장, 3공수여단장 최세창 준장, 5공수여단장 장기오 준장, 30경비단장 장세동 대령, 33경비단장 김진영 대령....”

작전참모 박 대령은 김포 부근 야포단의 단장 구명회 대령에게 전화로 작전준비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구 대령은 밀집지역인 서울시가전에서 포를 사용할 수는 없다고 반대했다. “우리가 월남전에서도 베트콩 몇 명을 잡자고 민가에 포를 겨누지는 못하지 않았습니까?” 박 대령도 할 말이 없었다.

그날 밤 장 사령관에게 두 번째이자 최후로 반란군 진압을 위한 결단의 시간은 자정쯤이었다. 이때는 1공수여단장 박희도 준장이 부대로 들어가 직접 병력을 이끌고 행주대교를 건넌 뒤였다.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는 것이 1공수여단의 반란 임무였다.

영화 '서울의 봄'에서 전두광(황정민 분)과 이태신(정우성 분)이 신경전을 벌이는 장면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상황을 파악한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0시 반, 행정병까지 포함한 병력 100여명과 전차 4대, 그리고 토우 미사일 10여기로 공격개시선을 구축하라고 지시했다. 작전참모 박 대령은 토우 미사일에 생각이 꽂혔다. 반란군 진압작전에는 분명 결정타가 되겠지만 역시 민가에 큰 피해를 입힐 게 걱정이었다. 토우는 꽁무니에 명주실 같은 유도선이 붙어 있어 이것이 시가지 전깃줄이나 나뭇가지 등에 걸려 끊어지면 포탄이 타격 방향을 잃고 제멋대로 날아가는 문제가 있다. 박 대령은 토우 미사일 중대장에게 지시했다. “미사일은 절대 개함하지 말라. 여기서 써먹을 용도가 없다.”

이때 양식 있는 군인은 반란군에 포를 쏘지 못했으나 불과 다섯 달 후 그 반란군 집단은 광주시민항쟁에 주저하지 않고 발포했다. 크게 대조되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영화 ‘서울의 봄’이 화제다. 개봉 열흘여만에 이미 수백만 관객을 끌어들였다. 관객 천만을 낙관하는 분위기다.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패륜적이고 잔혹한 12·12군사반란을 그린 영화다. 런닝 타임 2시간20분으로 상당히 긴 영화인데도 군사반란의 풀 스토리를 담기엔 한계가 있었다. 잘 만든 영화지만 반란자들을 가명으로 했고 의미 있는 대목들이 너무 압축 표현된 것이 아쉬웠다. 나치 독일의 과거사는 영화 등 많은 문화예술 작품들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이에 비해 일본 군국주의 책임론이 취약한 것은 문화예술 소재로 많이 다루지 않은 이유도 있다. 우리의 불미스런 과거사도 마찬가지여서 ‘서울의 봄’과 같은 작품들이 더 많이 만들어지고 공유돼야 할 것이다.

12·12는 1980년 5·18광주항쟁에 대한 살상진압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다. 두 역사적 범죄의 주범집단은 정치군벌 ‘하나회’였다. 대통령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권총 살해된 10·26의 배경 중 하나인 부마항쟁에 진압부대로 투입된 1·3·5 공수여단장도 모두 하나회였다. 훗날 하나회는 한국사회 곳곳의 독점적 지배집단을 비유하는 말로 유행했다. 오늘날도 다수로부터 비난받을 소수집단의 하나회 놀음을 보면 미래의 불안감마저 떨쳐버리기 어렵다.

하나회는 군사반란으로 군권을 탈취해 또 다시 유신군사독재 2기를 획책했다. 이에 항거하며 민주화를 요구하는 광주시민항쟁에 대해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발포했다. 본격적인 국권 찬탈을 위한 내란 행위로 대법원이 최종 판결한 바 있다. 이들의 유혈진압은 언론에 재갈 물리는 사전 검열 때문에 전국의 국민에게 알려지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당시 3년차 기자로 신문 가인쇄 대장을 들고 서울시청에 자리잡은 계엄사령부 언론검열단에 드나들었다. 광주항쟁이 터지기 전 어느날 칠판에, “대학생들이 시위를 끝낸 후 거리 청소했다는 기사는 보도 불가”라는 검열지침이 쓰여진 것을 보면서 그들의 주적이 언론과 대학생층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광주에서 엄청난 상황이 벌어진 5월 18일 이후 22일 아침까지 시민항쟁과 잔혹한 살상진압 행위는 검열에 잘려 일절 보도되지 못했다. 기자들은 광주항쟁을 보도하지 못하는 신문은 발행할 수 없다며 검열과 제작을 거부했다. 그후 내란집단은 국권찬탈의 마지막 수순으로 언론인 강제해직과 언론사 통폐합을 감행했다. 정치군인 집단이기 때문에 광주항쟁의 전국화를 막고 더 나아가 내란정권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언론 장악이 필수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저지른 언론 학살의 피해는 아직도 다 회복되지 않았고 역사 기록으로 남기지 못한 부분도 많은 실정이다.

김재홍 서울미디어대학원대 석좌교수 (전 서울디지털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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