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 = 서병기 선임기자]국내 1세대 조경가 정영선의 사계절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땅에 쓰는 시’가 잔잔하게 퍼져나가고 있다. 지난 4월 17일 개봉하고도 여전히 관객들이 찾고 있는 등 스테디셀러 조짐이다.
지난해 열린 제20회 EBS국제다큐영화제(‘EIDF2023’) 개막작이기도 한 ‘땅에 쓰는 시’는 국내 1세대 조경가 정영선(83)을 통해 조경과 자연과의 조화를 통한 우리 삶의 의미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도심속 선물 같은 선유도 공원과 국내 최초의 생태공원인 여의도 샛강생태공원, 과거와 현재를 잇는 경춘선 숲길, 서울 아산병원, 호암미술관 희원, 국립중앙박물관, 제주 오설록 티 뮤지엄, 디올 성수 등이 조경가 정영선이 땅을 향한 철학과 내일의 숲을 위한 진심을 담은 작품이다. 영화는 조경가 정영선이 어떻게 공간과 사람 그리고 자연을 연결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서울대 농대 60학번으로 83세의 나이에도 열심히 ‘현장’을 뛰며 조경에 대한 끝없는 열정을 보여주는 정영선 조경가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뒤늦게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필자도 느끼는 바가 있다. 정영선 조경가는 왜 80대에도 여전히 현역으로 필드를 뛰며 많은 일을 할 수 있을까?
첫째, 한국의 자연을 롤모델로 한다는 점이다. 정영선 조경가는 수없이 한국의 산과 들을 둘러보면서 머리속에 넣어 DB로 저장하고 있다. 그 어떤 조경가보다 다양한 한국의 미를 파악하고 있다. 이는 필자가 학창시절 국어교과서에서 읽은 삼불 김원룡 선생의 “한국의 미는 자연의 미”라는 맥락과도 통할 듯하다.
정 조경가는 “우리나라는 큰 정원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국토가 또 있을 수가 없다. 동해, 서해, 남해가 다르고 산마다 다르고 대단히 아름답다”고 말한다.
정 조경가는 이러한 자연이 가진 속성에 이용자의 방향성을 고려하고, 거기에 자신의 이야기를 약간 덧대는 ‘연결사’로서의 자신의 조경스타일, 또는 철학을 밝혔다.
그의 조경 설계 철학이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싶다. 이 말은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이 백제 온조왕 시기의 궁궐을 보고 한 말이다.
필자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일본이 '한일가왕전'의 일본 막내 스미다 아이코가 부른 80년대 히트곡 제목 'ギンギラギンにさりげなく'(긴기라기니 사리게나쿠, 화려하지만 자연스럽게)처럼 화려함 자체를 자연스럽게 만들려는 미학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 자연은 압도할 정도로 강력하지 않고 부드럽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데, 정 조경가는 그것을 정원에도 조화롭게 접목시켰다. 그가 설계한 조경과 자연이 경계가 이어지고, 굳이 ‘차경’이라는 단어를 쓸 필요가 없는 것도 이런 철학에서 기인한 것 같다.
둘째, 조경가 정영선은 미감(美感)이 너무 좋다. 작은 것에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양평 자택의 정원을 둘러보며 작은 풀, 꽃 한송이를 보면서 연신 “아이구, 예뻐라”를 연발한다. 하루하루 변하는 식물들과도 대화를 나눈다. 이런 마음으로 살고 있으니 마음이 늙을 수가 없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의 과수원 바위 틈에 흐드러지게 피었던 백합들을 본 것을 지금도 잊지 못하는 ‘소녀 (감성)’다. 대학시절 홀대당하듯 피어있는 노란 꽃의 미나리아재비가 그의 시그니처 식물이 되어 자신의 정원 도처에 있는 것도 그런 이유다.
세째, 그는 자신의 조경 스타일을 시(詩)에서 영감을 얻는다는 점이다. 그렇게 해서 한국경관이 가진 인문정신이 작품으로 구현된다. 정영선 조경가의 정원은 겉으로 보이는 것 뿐만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사람을 생각할 수 있게 한다. 서울 아산병원 정원을 설계할때, “환자가 병실에서 울 수는 없지 않나. 여기서 잠깐 울 수 있다. 의사, 간호사도 마찬가지”라고 말한 것도 “사람이 있는 정원” “사람을 위한 정원” “사람에 대한 배려가 있는 정원”임을 알 수 있다. 그에게 '시'는 작품 설계의 위대한 도구다.
wp@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