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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풀 흔들리고 빛 부서지는 자연 모방한 무대 연구” [헤경이 만난 사람-이태섭 무대미술가]
연극·무용·창극 아우른 무대 거장
올해에만 각기 다른 ‘햄릿’ 두 편
설명하는 무대는 사라진지 오래
무대는 사건이 일어나게 하는 곳
35년 여정 여전히 실험적 무대 꿈
한국 연극계에서는 이태섭의 무대가 명실상부한 트렌드다. 그는 시기마다 트렌드를 만들고, 트렌드를 이끌었다. 이태섭 무대의 큰 특징은 세련된 미니멀리즘이다. [T Space 제공]

유유히 흘러내리는 모래사막처럼 폭이 넓어지는 기다란 계단 한편. 연극 ‘햄릿’에서 타이틀롤을 맡은 배우 조승우가 걸터앉는다. 극적인 효과를 줄 핀 조명은 없다. 상념은 가득하나,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도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 햄릿은 ‘삶과 죽음’, ‘존재의 의의’를 고뇌한다.

“사느냐 죽느냐 죽느냐 사느냐. 이대로 살아갈 것인가 여기서 끝낼 것인가. 존재할 것인가 말 것인가. 내가 이 곳에 있다 없다.”(연극 ‘햄릿’ 중)

무대미술가 이태섭은 “조승우가 ‘햄릿’ 안에서 가장 중요할 수 있는 대사들을 계단으로 옮겨와야 했다”며 “쓰라고 만든 무대이니 이토록 다양하게 활용한다는 것은 디자이너 입장에서 무척 고마운 일”이라며 웃었다.

네 개의 줄에 매달려 무대의 일부가 공중으로 떠올랐고(연극 ‘리어왕’), 잔잔한 바람이 일렁이는 풀숲 언덕(연극 ‘토카타’)에 배우를 세우기도 했다. 무대를 가로지르는 도랑에 시내가 찰랑였고(창극 ‘리어’), 소도구가 매달려 장면마다 오르내리더니 마지막 장면에선 무대(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를 텅비워냈다. 또 다시 ‘전형’은 깨졌다. 깊고 길게 이어진 23m의 계단. 그곳은 거대한 왕국이었으며 세계와 세계를 잇는 가교이기도 했다. 시대·세대·국가를 넘어 회자된 명대사의 완전한 재해석이 그 곳에서 이뤄졌다. 무대는 작품의 관점과 시선을 바꿨다. 한국 연극계가 사랑하는 ‘무대 거장’ 이태섭(70)이 만든 ‘햄릿’의 공간이다.

최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이태섭은 “무대 미술은 머릿속으로 상상한 세계를 실현가능한 비주얼로 풀어나가는 과정이고, 무대미술가는 극적 상황을 연출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올해에만 ‘햄릿’ 두 번...“아직 연구 대상”

올해에만 두 번째다. 그는 셰익스피어 원작 ‘햄릿’의 무대 디자인을 각기 다른 프로덕션에서 두 번이나 맡았다.

“‘햄릿’은 무대미술가에겐 늘 깊은 연구의 대상이에요. 셰익스피어 작품 중 가장 매력적이라 할 만큼 해석에 따라, 시대를 뛰어넘는 정치극이자 사회극이 될 수 있는 보편성을 갖고 있죠.”

매력적인 만큼 ‘도전적’인 작품이 ‘햄릿’이다. 이태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고 변주되는 만큼 웬만한 디자이너는 한 번씩은 해본 작품”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일 년 동안, 그것도 불과 2개월 차이(9월 폐막한 신시컴퍼니 제작 ‘햄릿’)로 같은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것은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완전히 달라야 한다”는 고민이 따라왔지만, 두 편의 연극은 두 연출자 손진책(신시컴퍼니 ‘햄릿’), 신유청(예술의전당 제작 ‘햄릿’)의 다른 해석으로 각기 다른 무대가 완성됐다. 두 무대는 주요 시각적 콘셉트로 각각 ‘거울’과 ‘계단’을 선택했다.

조승우의 첫 연극으로 화제가 된 이번 ‘햄릿’(17일까지·예술의전당)은 다른 누구도 아닌 ‘햄릿’을 위한 무대였다. 이태섭은 “예술의전당의 ‘햄릿’은 다른 ‘햄릿’보다 원작에 충실한 해석으로 햄릿의 모습을 극대화하고자 했다”며 “마치 패션쇼의 런웨이처럼 깊은 곳에서 나와 관객에게 지배적인 에너지로 다가올 수 있는 무대를 만들었다”고 했다.

무대는 조명, 무채색 콘크리트, 철제 소품이 빚어낸 한 편의 시(詩)와 같았다. 무대 끝자락에 쓰러질 듯 세워진 사선의 기둥, 그곳에서부터 무대 중앙까지 기다란 계단이 이어지도록 했다. 우측 벽면 옆에 세워진 2층 높이의 계단에선 호레이쇼와 햄릿이 덴마크를 굽어본다. ‘계단’과 ‘기둥’만으로 구성한 무대는 감옥이 돼버린 왕국과 무너져가는 구시대 질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극단적으로 절제했지만, 관객의 시선을 압도하는 미니멀한 무대는 연극의 메시지를 압축적으로 담아낸다. “햄릿이 느끼는 공포를 보여주며 정치극적인 느낌을 강조하고, 항상 누군가를 지켜보고 조정하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었다”고 이태섭은 귀띔했다. 그러면서도 ‘기능적 측면’이 강조됐다.

“무대미술을 할 때 첫 번째로 고려하는 것은, 공간은 배우의 연기를 위한 건축이 돼야 한다는 점이에요. 공연장 객석의 경사는 완만해 앞 자리 관객에게 가려지면 배우의 상반신밖에 볼 수가 없어요. 하지만 무대에 경사가 있다면 (뒷 자리 관객들도) 배우들의 모습을 더 잘 볼 수 있죠.”

관객이 바라보는 햄릿은 ‘왕의 카리스마’를 갖고 관객을 백성처럼 포용하듯 내려다본다. 배우의 관점에서도 무대를 마주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무대의 구조가 등장인물과 관객의 관계까지 재설정한 것이다.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연출 고선웅)에서도 나타나는 방식이다.

무대의 구조에 따라 배우의 동선도 달라진다. 작품에서는 다양한 출구를 뒀고, 계단을 통해 배우들의 움직임에 보다 많은 이야기를 담았다. ‘리프트’를 활용, 오르내리는 무대를 만들어 각 인물들의 동시상황도 연출했다. 이태섭은 “배우가 어디로 나와 어디로 가는지, 어디를 거니는지는 관객의 상상력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무대를 만들 때 동선도 고려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했다.

미학의 절정 구현...세련된 ‘미니멀리즘’

“상상 속 비주얼을 무대 위로 올렸는데, 생각했던 것과 다르면 극장에선 재앙이죠(웃음).”

1990년 연극 ‘오이디푸스 렉스’로 프로 무대미술가로 데뷔한 이태섭은 연극은 물론 무용, 오페라 등 장르를 넘나들며 모든 공연을 매만진다. 대극장 공연을 기준으로, 하나의 무대를 만들기 위해 투입되는 시간은 장장 6개월. 그는 “과거엔 여건이 좋지 않아 3~4일 만에 무대를 올리기도 하고, 기술적으로 구현할 수 없는 것이 많아 어설픈 무대도 많았다”며 “물리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하고, 예측불가인 극장에서 최대한 실수를 줄이기 위해 끊임없이 테스트 과정을 거치다 보니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이태섭 무대’의 가장 큰 특징은 ‘미니멀리즘의 세련미’다. 작품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투영하면서도 무대가 보여줄 수 있는 미학의 절정을 구현한다.

하지만 그는 “무대 미술의 가장 큰 매력은 매번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장르마다 연출가마다 작품이 요구하는 것이 다르기에 다른 장르처럼 같은 것을 반복하거나 계속하지 못해 고유의 스타일을 내세우긴 힘들다”고 말한다. 다만 전 세계 공연계를 아우르는 무대 트렌드는 있다. 그는 “현재 대부분의 연극에서 ‘설명하는 무대’는 사라진지 오래”라며 “지금의 무대(트렌드)는 살아있는 상징”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유럽권의 연극 무대 트렌드는 새로운 아이디어로 무장한 미니멀하면서도 컨셉추얼한 방향으로 이동했다. 미니멀리즘의 무대는 사운드 디자인 분야와 발전된 조명 설계가 극장으로 들어오며 강화됐다. 사운드와 조명에 힘을 주자 설명하는 무대는 오히려 극의 몰입에 방해가 된다는 인식이 퍼졌다. 다만 미국 연극에서는 아직도 집안 구조를 그대로 옮긴 듯한 사실주의 연극의 형태가 주를 이룬다.

한국에서는 이태섭의 무대가 ‘현존하는 트렌드’다. 이태섭 스스로는 “나만의 스타일을 정립한 시기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했다. 그는 1995년부터 용인대 연극학과 교수로 후학을 양성했고, 학생을 가르치면서도 왕성한 활동으로 매번 진화하는 무대를 구축, 명실상부 ‘살아있는 전설’로 자리했다.

그는 시기마다 트렌드를 만들었고, 이끌었다. 사실주의 무대가 주류였던 1990년대에는 송승환·윤여정 주연의 연극 ‘유리동물원’을 통해 리얼리즘의 정수를 보여줬다. 이 무대에 대해 그는 “당시만 해도 무대 곳곳에 디테일하게 들어간 부분들을 보는 것이 쉽지 않았던 시절”이라며 “사실적인 요소에 기반하면서도 표현주의 스타일로 거칠게 매만지는 등 공을 많이 들였다”고 했다.

1997년 연극 ‘자전거’는 이태섭의 첫 미니멀리즘 무대다. 일찌감치 진화한 스타일의 무대를 구현하며 한국 공연계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이후 2000년대에 접어들어선 다양한 무용 작업을 함께 하며 상징적 무대에 대한 이해를 넓혀갔다.

그는 “무대는 사건을 설명하는 곳이 아니라 사건이 일어나게 하는 곳”이라며 “그렇기에 연극 무대는 하나의 고유한 형태로서 일상성을 벗어나 색다른 예술품을 보여주는 것이 현대 관객에게 맞는 시도”라고 했다.

지난 35년간 그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무대에는 늘 그가 걸어온 긴 여정이 스며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실험적인 무대를 꿈꾼다. 심지어 그는 “모든 예술은 자연을 모방하는데, 무대 위에선 그것을 구현할 수 없어 아쉽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다만 그의 무대는 이미 꿈에 가까워진 듯도 하다. 지난해 공연한 손숙의 ‘토카타’는 연극이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의 자연을 보여줬다. 배우가 등장하자 무대 위에서는 낯선 풀들이 물결처럼 일렁이는 듯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는 “연극이 만든 자연이었지만, 많은 한계로 모두 보여줄 수는 없었다”며 웃었다.

“무대는 멈춰있는 곳이기에 공기의 흐름을 느낄 수가 없어요. 극장 안에서 잔디의 풀이 흔들리고, 자연적인 빛이 부서지고, 얇은 천이 날아갈 수 있는 자연을 모방한 무대를 만들고 싶죠. 그게 요즘 저의 연구 주제예요.” (웃음)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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