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강욱 코트라 리마KBC 차장
페루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의 기업인들은 비즈니스 상담이나 협상 때 직접적인 대립, 논쟁, 거절 보다는 간접적이고 암시적인 방법을 더 많이 사용한다. 예컨대 전화를 했는데 며칠이 되도록 계속 자리를 비우거나, 하루 종일 계속 회의 중이거나, 자료를 계속 검토 중이라고 답변하는 경우다. 출장 갔다와 다시 얘기하자거나, 회신해 준다면서 몇 주, 몇 달이 지나도록 회신을 안줘 상대방이 지쳐 스스로 포기하고 단념하도록 하는 방법이다.
이런 라틴아메리카인들이 지닌 문화를 ‘고문맥(high context)’ 문화라고 한다. 스페인, 이태리 등 남부 유럽을 비롯한 라틴아메리카와 한국, 일본,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는 미국, 영국, 독일 등 공식적이고 간결한 서면 위주의 비즈니스를 하는 ‘저문맥(low context)’ 문화와 대비된다. 개인적인 정과 감정을 중시하는 한국인과는 라틴아메리카 문화가 정서 상 통하는 점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라틴아메리카인은 분명한 이유 없이 상대에게 금전을 양보하는 것을 싫어한다. 특히 페루는 품질 보다는 가격이 경쟁력을 결정하는 시장이라 이런 경향이 기업 대 기업의 상담에서도 나타난다. 가격협상 때 약간 양보해 주는 것을 무슨 큰 혜택을 베풀어 주는 것처럼 생각하곤 한다. ‘계약’도 협상의 종결이 아닌 업무를 진행하기 위한 수단쯤으로 여긴다. 계약서 상의 기한이나 시한은 반드시 지켜야 할 필수사항이 아니라 업무를 잘 추진하기 위해 편의상 명시해놨다고 본다.
라틴아메리카 기업체는 보통 위계질서가 매우 분명하다. 실력, 능력, 지식, 경력 보다는 나이, 성별, 경력, 연줄로 기업 내 위치와 영향력 등이 결정된다. 특히 가족 기업이 많아 공개 채용 보다 그냥 가족, 친척, 아는 사람을 통해 고용하는 경우가 흔하다. 조직 안에서 장기간 진급이라는 것을 모르고 한 자리에서만 일하는 사람도 많다. 겉으론 여성을 우대하지만 속으로는 남성 우월주의가 강하다. 최고경영층은 보통 나이도 많고, 경력도 많은 남자다.
더욱 주목할 점은 기업체 경영자는 외부 사회 곳곳에 이른 바 ‘줄(enchufe)’을 갖고 있어 서로 필요할 때 돕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다. 경영의 결정권은 항상 최고의 1~2인에게 있다. 팀웍을 보기 어렵고 최고경영자가 결정하면 그냥 그에 따른다.
따라서 수출 상담을 할 때는 상대 기업의 최고 핵심인물이 누구인가, 실제 누가 의사결정을 하는가를 파악하고 그를 대상으로 집중 접근해야 한다. 아무리 실무 담당 직원하고 얘기해 봐야 입만 아프고 시간만 낭비할 뿐이다.
이렇게 권한의 집중이 생긴 원인은 스페인의 라틴아메리카 정복사에서 찾을 수 있다. 16세기 남미를 정복한 스페인인들은 로마법에 의거한 사유재산 불가침, 상속권 등의 사상을 식민지에 도입했고, 이런 개념은 정복자인 스페인인이 독점했다.
남미 독립 후 페루에선 해안 인접 지역을 중심으로 토지의 집중이 진행돼 노예제에 입각한 일종의 귀족제도가 계속됐다. 경제력 집중의 자취가 남아 민간 기업체에서도 최고 의사결정 권한을 사장 혼자서 보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처음 회사 실무 담당직원의 반응과 다르게 나중에 최고경영자의 의사결정에 따라 다른 결과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어떤 라틴아메리카 업체와 거래하더라도 가능한 한 최고 책임자를 만나서 유대를 강화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