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샌델 미국 하버드대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와 함께 국내 서점가를 휩쓸고 있는 ’아프니까 청춘이다’에서 저자인 김난도 서울대 교수는 청소년들에게 "내 인생의 오답노트를 적어보라"고 권한다.
틀린 수학문제를 왜 틀렸는지 검토하고 다시 한번 풀어보는 공책이지만, 두 번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우리 인생에도 오답노트가 필요하다고 충고한다. 값비싸게 얻은 교훈을 학습하지 못하고 같은 잘못을 다시 범한다면 발전과 희망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국내 M&A시장을 뜨겁게 달궜던 현대건설 매각 사례에 대입하면 어떨까. 김석동 금융위원장이 (매각)속도를 내겠다고 밝힌 우리금융을 비롯 대우조선해양ㆍ하이닉스ㆍ대우건설ㆍ대한통운 등 수십조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된 기업매각에서 같은 오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매각과정의 ’오답노트’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현대그룹 대신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현대차그룹은 다음 주까지 4주 일정으로 현대건설 재산을 실사 중이다. 자금조정 협상과 본계약 등을 거쳐 인수대금을 완납하면 빠르면 4월 중 인수절차가 최종 마무리할 듯하다. 현대그룹의 매각 원천 무효 소송 가능성이 없지 않으나 대세를 거스르기는 힘겨워 보인다.
그렇더라도 매각 혼선에 따른 책임 규명은 짚고 넘어가야 할 듯하다. 현대건설 채권단의 갈짓자 걸음은 서울중앙지법이 현대그룹의 MOU 해지금지 가처분신청을 기각하면서 이례적으로 밝힌 재판부 소회에 잘 나와 있다. 채권단 스스로 세운 원칙을 번복했을 뿐더러 MOU 외 내용까지 해명 및 자료 제출을 요구, 혼란을 가중시켰다.
매각주관사인 외환은행은 입찰마감 이튿날 현대그룹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하면서 "공정하고 투명한 절차에 따라 심도있게 평가했다", "자금증빙서류의 재검토는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현대차 측 공세에 곧 "자금조달에 불법성이 있다면 MOU를 해지하겠다", "(현대그룹 대출확인서는) 의혹 해소에 불충분하다", "MOU내용을 성실히 이행했다고 보기 어려워 우선협상대상자 지위를 박탈한다"며 태도를 180도 달리했다.
외환은행은 5조5100억원을 주겠다는 현대그룹 대신 5조1000억원을 써낸 현대차에 매각함으로써 이미 4100억원의 매각익을 날려버렸다. 은행과 주주들에게 손해를 끼친 업무상 배임 및 직무유기에서 자유롭지 않다.
현대건설 2대 주주로 정부 입장을 대변하는 정책금융공사의 말바꾸기도 심했다. "자금 출처는 심사대상이 아니다"라던 당초 입장은 11월말 국회 현안보고 이후 "대출계약서 등 증빙자료를 제출하지 않으면 MOU를 해지할 수 있다"로 급선회했다.
200일 가까이 걸린 대우건설과 현대종합상사 매각 전례에 견줘, 불과 2개월 안팎의 초고속 매각도 이례적이다. 현대 및 현대차 말고도 또 다른 그룹의 인수참여 기회를 사실상 봉쇄해 경쟁입찰을 통한 고가 매각전략에 찬물을 끼얹었다.
공적자금 투입 기업의 매각 매뉴얼 작성, 백서 제작 등 제도적 보완이 필요한 이유다. 금융당국 역시 "채권단이 알아서 할 것", "채권단과 매수자가 자율적으로 협의해 해결할 문제"라며 방관자 입장을 취한 점도 아쉽다.
현대건설 매각 혼선은 국내 M&A 역사에 커다란 분수령이 될 것이다. ’승자의 저주’를 막으려는 채권단 입장은 이해하나 인수자금의 건전성만 지나치게 따질 경우 M&A시장은 위축될 수 밖에 없다. 매수자금을 빌려주면서까지 기업 인수를 종용하던 과거 악습에서 벗어난 채권단의 자기자금 인수 유도는 진일보한 처사지만, 기업인의 도전의식이나 M&A를 통한 기업확장 가능성마저 원천적으로 막아서는 안 된다.
정부와 감독당국 채권단은 다음 정권 때 현대건설 매각 청문회 가능성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현대건설 매각 관련 ’오답노트’를 확실히 정리했으면 한다. 이는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현대차에게도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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