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가장 똑똑한 학생집단, 과학계의 산실, 미래 국가경제 엘리트 양성소….
온갖 찬사의 대상이었던 카이스트(KAIST)가 대혼란에 빠졌다. 4명의 어린 학생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급기야 지난해 최우수교수로 뽑혔던 교수마저 자살했다. 학생들은 성적 경쟁과 영어교육 등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고, 교수는 연구실 운영비 감사 적발로 고민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살의 원인은 다르지만 카이스트는 충격 그 자체다. 카이스트 개혁을 주창해 온 서남표 총장의 자발적 사퇴 문제까지 불거져 온 나라가 시끄럽다.
충격을 받은 것은 카이스트 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다. 왜 특목고, 자율고 등에서 1~2등 하던 천재 꿈나무들이 죽음이라는 극단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을까. 죽음을 부를만큼 우리 사회의 ‘경쟁 제일주의’가 그렇게 문제인가. 혹시 그 책임의 상당 몫이 우리 사회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닌가. 국민들은 혼란스럽다.
엄마 치마폭에 둘러싸인 청소년들의 나약한 심성,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 자살률 등 여러가지 원인을 거론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번 카이스트 연쇄 자살 사건을 설명하기엔 설득력이 한참 모자란다.
우리의 꿈나무들은 가치관이 채 확립되기도 전에 무한경쟁에 내몰렸다. ‘모 아니면 도’식의 생존게임에 던져졌다. 남을 짓밟고 올라서야만 ’실력’을 인정받았다. 교수의 자살도 따지고 보면 성과 조급증에 따른 과욕이 초래한 것이 아니냐는 시각이 나오고 있다. 상아탑 학원 마저도 극단 경쟁의 최일선에 서 있었던 것이다.
임운택 계명대 교수(사회학과)는 “한국사회의 과잉경쟁 시스템이 초래한 메가톤급 충격”이라며 “지금까지 경쟁을 최고의 선(善)으로 치면서 이에 대한 부작용을 소홀히 한 결과”라고 진단했다.
그러나 카이스트의 비극에도 불구하고 경쟁사회 그 자체를 거부할 수는 없다. 인류 사회를 발전시켜온 경쟁, 더 나은 사회를 지향하는 경쟁은 거역할 수 없는 키워드이기 때문이다.
다만 죽고싶을 만큼 몸서리쳐 지는 경쟁을, ‘합리적이고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선의의 경쟁’으로 바꾸는 것은 우리 모두의 과제다. 개인이나 학교, 특정 단체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우리 사회 전체가 경쟁에 대한 마인드를 바꾸고, 경쟁에서 오는 폐단을 보완하는 제도적 틀을 완성하는 데 힘을 보태야 가능한 일이다.
정길생 한국과학기술한림원장은 “카이스트 사태만을 놓고 경쟁이라는 화두 자체를 포기하는 것은 바람직한 인식이 아니다”라며 “일단 대학의 경우 학생들의 정서 안정에 상당한 신경을 써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는 “경쟁중심에서 벗어나 협력과 주체적 학습체제를 갖춰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과학, 사회, 문화, 재계 관계자들은 1등은 우대하되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도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문화가 당장 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경쟁에서 이긴 사람에겐 갈채를 보내되, 뒤쳐진 이들에게도 격려의 박수를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낙오된 사람에게도 사회적 안전망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사회학)도 “ ‘나는 가수다’ 등 오디션 프로그램을 비롯해 상당수 방송 프로그램에서 한 두명의 탈락자에게 절망감을 안겨주는 등 사회 여러 곳에서 소수를 무능한 존재, 패자로 만드는 구조”라며 “소수의 승자에게 커다란 보상을 주고 패자에게 가혹한 처벌을 하는 현재의 사회시스템을 바꿔, 승패와 상관없이 기본적으로 인정되는 기본권 위에서의 경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1등 만이 찬사를 받고 나머지는 들러리를 서는 우리 문화, 우리 모두에 체질화된 그런 얄팍한 마음을 바꾸지 않는 한 ‘제2의 카이스트’는 또 재연될 수 밖에 없다. 중간도, 또 꼴찌라도 당당히 사회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나라. 그런 문화를 가꿔가는 게 어린 목숨들에게 진 빚을 갚는 일이다. 카이스트가 주는 교훈이다.
<김영상ㆍ박도제ㆍ김상수 기자 @yscafez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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