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뉴스
  • 코리안 드림…조명철 원장
탈북자 출신 첫 고위공무원…통일교육원 원장 그의 꿈은
장관 아들, 김일성대학 교수‘북한 최고 엘리트’

中 교환교수 시절 북한을 너무 많이 알게되고, 

내가 탈북하면 김정일이 정신 차릴까 싶었다.

부모님은 추방됐다고도 하고, 

몇 년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도 들리고

두고 온 귀중한것들이 자꾸 생각나 힘이 든다.

가족·친구·스승 모두 북한에 있는데 전화 한 통 할 수 없고, 

애써 번 돈도 보내드릴 수 없고

남한에 온지 벌써 18년, 처절한 외로움 속 나를 지탱한 것은 오직 통일

통일된 한국서 북에 있는 가족에게 맘놓고 연락하고 지내는게 꿈.




조명철(52) 통일교육원 원장은 ’탈북자의 코리안드림’이고 탈북자 출신 첫 고위 공무원이다. 더불어 그의 성공은 탈북자 2만명 시대의 상징이다. 척박하기만 한 남한 땅에서 이 악물고 살아가는 탈북자들은 조 원장의 취임 소식에 환호했고, 그는 뜨거운 눈물로 답했다. 

그의 깜짝스런 공직 발탁은 남한과 북한에 보내는 시그널이기도 하다. 현인택 통일부장관은  "조병철의 성공적인 안착은 곧 탈북자들의 남한 내 위상의 커다란 변화"라고 말했지만, 자극받은 북한은 조 원장을 향해 ’인간 쓰레기’라고 했다.

지난달 7일 취임, 막 취임 한 달째에 접어든 조명철 원장을 북한산 자락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내가 차지한 이 자리는 사실 2만명의 탈북자들에게 준 자리”라는 그는 줄곧 먼 산을 바라봤다. 북한에 대한 분노로 상기된 목소리는 곧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죄스러움으로 잦아들어 갔다. 한 시간 넘게 진행된 인터뷰는 그의 굴곡 많은 삶을 대변하듯 절망과 희망, 용기로 넘쳐 흘렀다.

김일성대학 교수 출신, 북한의 최고 엘리트, 장관의 아들…. 탈북자 조명철의 앞에 붙는 화려한 수식어들이다. 남한에서 그는 희귀하게 취급됐고, 그의 삶도 여느 사람과 달랐다. 1994년 타국이나 마찬가지인 남한 땅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18년 동안 그의 외로움은 처절했고, 그 처절한 외로움에서 자신을 지탱한 것은 오직 통일에 대한 바람이었다.

통일교육원 원장으로 취임한지 한 달째 접어든 조명철 원장. 북한산 자락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굴곡많은 삶을 대변하듯 절망과 희망, 용기로 넘쳐 흘렀다.

▶“ 성분 좋은 내가 탈북하면…”

조 원장의 아버지는 정무원 건설부장(건교부 장관)을 지닌 조철준 씨다. 어머니 강하옥 씨도 인민경제학 통계학 교수다. 소위 ‘성분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장ㆍ차관 자제들만 다닌다는 평양 남산학교를 나왔다.

김일성대학에서 석ㆍ박사 과정을 밟고 바로 김일성대학 교수로 임용됐다. 겉보기에 흠잡을 데 없이 매끄러운 삶이었다.

그러나 머리가 굵어질수록 체제에 대한 불만은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불만을 소리내어 말할 수 없는 현실이 그를 옥죄어 왔다.

“앞집에 재경부 장관이 살았는데 ‘나랏돈 좀 제대로 쓰자’는 한마디를 하고 바로 수용소로 끌려갔어요. 북한은 아무리 최고위층에 있어도 자유롭게 얘기할 권리가 없는 나라예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연좌제를 구사하는 나라이기도 하죠. 해외에서 공부하면서 북한의 문제점을 더 명확히 알아버린 겁니다. 소중한 가족과 지위를 지키고 싶은 욕구보다 솟구쳐 오르는 화가 점점 커져가면서 탈북을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남개대학 교환교수 시절, 그는 마침내 북에서 뛰쳐나왔다. 그는 “장관 아들이고 김일성대학 교수인 내가 탈북하면 김정일 정권이 정신을 차릴까 싶었다”고 말했다. 30년 만에 밟은 자유의 땅에서 그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말 대신 김정일 정권의 문제점을 외치고 또 외쳤다.


▶자유의 땅, 그리움과 죄책감

그러나 후련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자유의 마력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북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왔다.

부모님은 추방됐다고도 하고, 평양에 있다고도 했다. 몇 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 그는 “놓고 온 귀중한 것들이 자꾸 생각나니까 힘든 것”이라며 진한 한숨을 내쉬었다.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과 죄스러움을 덜어준 것은 밀려든 ’일’이었다.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글을 써달라, 주제 발표를 해달라는 요청이 물밀듯 쏟아졌어요. 저는 북에서도 박사 졸업한 다음날 임명 받아서 교수된 사람이니 평생 하루도 쉰 적이 없는 셈이죠. 인복도 있는 편인가봐요. 남한 대학교수들이 오자마자 술 먹자며 절 굉장히 많이 괴롭혔어요. 그렇게 술자리에 3년 끌려다녔더니 간이 다 망가졌대요.(웃음) 그래도 사람들과 일거리가 있어서 하루하루를 버텼죠. 아마 북한에서 일한 것보다 몇십배는 더 많이 했을 거에요.”


▶카랑카랑한 북한전문가

남한 사회에 미친 듯이 적응해 갔지만 이쪽 사회에도 문제점은 있었다. ‘말할 수 있는 자유’는 가졌지만 북한 사회의 현실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남한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북한의 실상을 잘 모르고 있어요. 좀 안다고 하는 사람도 북한의 한쪽 면만 바라볼 뿐, 다양한 면을 객관적으로 보고 있지 못하죠. 북한이 워낙 폐쇄적인 사회여서 정보가 충분치 않다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고, 자신의 이념에 사실을 꿰어 맞추려는 아집이 두 번째 원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대로 된 통일정책이 나오려면 정확한 북한 분석이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 그의 확고한 신념이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국제개발협력센터 소장을 역임한 그는 북한 경제와 권력 구조를 분석하는 탁월한 북한학자로 일해왔다.

북한 정권에 대해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내던 그를 북한 당국은 곱게 보지 않았다. 그가 통일교육원장으로 임명된 직후 북한은 조 원장을 ‘인간 쓰레기’라며 매섭게 비난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위원으로 일하던 2000년 중국 출장길에 괴한에게 납치되기도 했다. 감시 중이던 중국 동포와 격투를 벌인 뒤 극적으로 탈출했다. 그는 중간에 몸값으로 송금한 돈은 송금계좌 인출 정지를 요청한 뒤 돌려받았다. 그는 납치범들이 몸값을 요구했을 때 “북한 공작원이 아니라는 사실에 오히려 한숨을 돌렸다”고 떠올렸다.


▶“ 원래 말술, 술 마실 틈이 없어요.”

‘공무원 조명철’의 일과는 평생 학자로 살아온 과거보다 훨씬 빡빡해졌다. 각종 회의와 유관기관 업무협조, 결제 등 쉼없이 날아드는 스케줄을 소화하다 보면 어느새 밤 10시를 훌쩍 넘기고 만다. 

“원래 술이 센 편”이라는 그가 지난 한 달간은 술을 통 입에 대지 못했다. 밤 10시에 집에 돌아와서 새벽 5시 다시 하루를 시작하는 강행군에 술잔이 끼어들 틈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요즘 서서히 (임무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그는 “우리가 북에 대해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이 너무 많고, 그것을 바로잡아 나가는 게 제 임무”라고 말했다.

“그동안 남북관계에는 교류협력도 있었고, 천안함ㆍ연평도 사건 같은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어요.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게 향후 통일교육의 가장 큰 축이 돼야 합니다. 정권이 바뀌고 대북정책이 달라졌다고 해서 책에서 있던 사실이 없어지고 축소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화목한 가정에 대한 밑그림도 그려가고 있다. 벌써 지천명의 나이를 훌쩍 넘긴 그는 여전히 미혼이다. 그동안 직장 동료들을 가족처럼, 교회 사모님을 어머니처럼 여기고 살았지만 늦은 밤 귀갓길에 그를 반기는 건 싸늘한 공기뿐. "저도 이제 결혼하고 싶습니다. 좋은 처자 있으면 어디 소개시켜 주세요.”(웃음) 


▶탈북인들의 ‘코리안드림’

탈북자들에게 조 원장은 성공 모델이자 코리안드림의 상징이다. 지난달 25일 북한이탈주민 성공 비전캠프에 참석한 그는 탈북인들의 엄청난 환호에 그만 눈물을 떨궜다.

“탈북자들이 모여 있으면 말이 잘 안 나옵니다. 그날도 눈물이 앞섰지요. 너무 고마워서요. 웬만한 용기가 없으면 자신의 귀중한 모든 것을 두고 북에서 나오기 힘들어요. 나오기로 결심했을 때 정신적 고통은 아마 상상도 못할 거예요. 그렇게 나온 사람들이 남한 땅에서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을 쳐요. 그게 너무 고맙고 고마워서….”

1994년 그가 남한에 닿았을 때 불과 몇십명에 불과했던 탈북인들은 벌써 2만여명의 거대한 사회를 만들었다. “내가 차지하고 있는 이 자리는 2만명의 탈북자에게 준 자리”라는 그는 또다시 목이 메어왔다.


▶“이 땅에서 성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조명철 원장에게는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있다. 통일된 한국에서 북에 있는 가족들에게 마음 놓고 연락하고 지내는 것이다.

“여기서 제가 대통령이 된다 한들 단 한순간이라도 행복할 수 있을까요? 제 가족과 친구, 친척과 스승이 모두 북한에 있는데 전화 한 통 할 수 없고 애써 번 돈을 보내드릴 수도 없어요. 그게 아픔인 겁니다. 통일은 그런 아픔을 끊는 기회이자, 국가적으로는 엄청난 성장동력을 창출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가 꿈꾸는 통일은 북한의 개방과 남한의 협력이 이뤄가는 점진적인 것이다. 북한은 스스로 핵무기를 포기하고 개혁ㆍ개방 정책을 밟아나가야 한다. 남한도 북한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가면서 화폐통합과 제도통합을 서서히 이뤄가야 한다.

이제 막 ‘탈북자 출신 첫 고위공무원’이라는 수식어를 얻은 그에게는 ‘성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현인택 통일부 장관이 “조명철 원장의 성공이 통일부 성공”이라고 말했듯, 그의 성공적인 안착은 곧 탈북자들의 남한 내 위상 변화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 어눌한 서울 말씨와 간혹 튀어나오는 북한 사투리를 가진 조 원장은 그래서 오늘도 애써 힘을 낸다. 보란 듯이 성공하기 위해, 그 성공을 발판으로 2만여명 탈북인들이 남북통일의 꿈을 이룰 수 있게하기 위해서다.

김윤희 기자/worm@heraldcorp.com
사진=안훈 기자/rosedale@ heraldm.com



지인이 본 조명철

“성실함 최대 장점

남쪽서 태어났으면

노벨상 탔을 석학”


북한 연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두 사람을 꼽으라면 황장엽 선생님과 조명철 원장이다. 황장엽 선생님이 주체사상을 골자로 한 정치활동에 주력했다면 조 원장은 그동안 묵묵히 북한 연구에만 매진해 온 사람이다. 북한 연구가 막 태동한 초창기 북한 현실을 알리고 통일에 대한 논의를 활발하게 한 주역들이다. 

10여년 전 조 원장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남한에 탈북주민이 흔치 않았다. 귀공자풍의 북한 엘리트를 앞두고 ‘우리와는 많이 다르지 않을까’라는 선입견이 앞섰다. 개인적인 친분보다는 북한 현실을 확인해보고 싶은 욕심에 그에게 다가갔던 것 같다. 스스럼없는 성격의 그는 금세 우리 ‘북한 연구 멤버’들과 어울렸고, 술도 참 많이 마셨다. 태어나서 자란 곳은 남ㆍ북한으로 달라도, 느끼고 고민하는 바는 조 원장과 남쪽 학자들이 다를 바가 없었다.

조 원장을 단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성실한 석학’이다. 오늘날 조 원장을 있게 한 최대 원동력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성실성이 아닌가 싶다. 명석한 두뇌로 성실히 써나간 논문을 읽다가 ‘남쪽에서 태어났으면 노벨상감이었을텐데’라고 탄식한 적도 있다. 

조명철 통일교육원장의 취임은 지금까지 남한 위주로 진행돼 온 통일정책에 북한을 더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동안의 통일정책이 우리의 일방적인 정책편의에 따라 좌지우지된 감이 없지 않은데, 정부가 조 원장을 의미있는 직책에 임명한 것은 북한의 현실도 반영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조 원장의 성공이 남ㆍ북한 통합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동료 학자이자 절친한 친구로써 바라는 바는 조 원장의 결혼과 건강이다. 하루 빨리 결혼해서 아이도 대여섯명 낳았으면 좋겠다. 그동안 일을 너무 많이해서 건강이 많이 상했을텐데 몸도 잘 챙겼으면 한다. 성공한 조명철과 조만간 소주 한잔 할 수 있길 바란다.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
          연재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