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황소 |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통과. 가도 좋소."
1953년. 이중섭은 침을 꼴깍 삼켰다. 입국심사 직원에게 가짜 선원증을 돌려받았다. "고맙습니다." 다행이다…. 중섭은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짐가방을 꾸역꾸역 들었다. "아, 그런데 잠깐." 직원이 중섭을 다시 불렀다. 위조가 걸린 건가? 이대로 도망쳐야 할까? 중섭은 오만가지 생각을 했다. "선원 양반, 혹시 괴혈병 아니야? 안색이 안 좋으니 병원부터 가보쇼. 아무리 일주일짜리 체류라고 해도…." 중섭은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중섭은 땀에 푹 젖은 채 바깥 공기를 맞았다. 짭조름한 소금 냄새가 코를 시큰하게 했다. 일본이었다. 사랑하는 아내, 목숨보다 귀한 두 아들이 있는 히로시마였다.
"아고(あご)리!" "아빠!"
중섭이 여관방 문을 두드렸다. 아내 마사코와 아들 태현, 태성이 달려왔다. 중섭의 세상에 이제야 색채가 깃들었다. 꿈에서나 보던 이들 앞에서 눈물, 콧물을 다 쏟았다. "그래, 건강은 어떻소? 밥은 잘 챙겨 먹고 있소?" 중섭은 훌쩍대며 마사코의 두 볼을 감쌌다. "아고리, 당신은요. 얼굴이 왜 이렇게 상했어요." 마사코도 울먹였다. "어쩌다 살이 이렇게 빠졌어요. 나보다 더 아파 보여요." 마사코는 중섭의 얇은 뱃가죽을 안았다. "나는 괜찮소. 나는 지금 최고로 행복하오." 중섭은 눈물을 쓱 닦고 활짝 웃었다. "너희들, 엄마 말은 잘 듣고 있었어?" 중섭이 묻자 아이들은 질세라 네, 라고 대답했다. "아빠, 내가 그린 그림 보여줄게요!" "저랑 자전거 구경하러 가요!" 중섭은 그런 아이들을 힘껏 껴안았다. 사랑한다, 정말 너무너무 사랑한다…. 중섭은 이 말만 계속했다.
이중섭, 시인 구상의 가족 |
꿈 같은 일주일이었다.
중섭은 마사코와 종종 걸었다. 손을 잡고 강줄기를 산책했다. 함께 해와 달을 바라봤다. 꽃과 나무를 구경하고, 강과 바다를 감상했다. 두 아들과도 실컷 놀았다.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술래잡기를 했다. 군것질거리도 잔뜩 먹었다. 중섭은 습관처럼 시계를 봤다. 이대로 초침이 고장 나길 바랐다. 온 세상이 멈췄으면 했다. 시간은 야속했다. 벌써 마지막 날 밤이었다. 중섭과 마사코, 마사코의 어머니(장모)가 함께 늦은 저녁을 먹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은 곤히 잠들었다. "그냥…. 그냥 돌아가지 않고 여기에 있을까 보오." 중섭은 고민을 털어놨다. "다시 갈 자신이 없소." 마사코도 중섭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젖은 두 눈만 깜빡였다.
"자네, 그건 안 될 일일세."
중섭의 무모한 결정을 막은 건 장모였다. "자네는 훗날 훌륭한 화가가 될 거야. 여기에 남으면 불법체류자가 되는 거야." 중섭은 얼굴을 푹 숙였다. "…그러니까 위대한 화가가 되고 나면, 그때 내 딸과 손자를 호강시켜주게. 모두 내가 잘 보살피고 있을 테니. 지금은 견딜 때야. 조금만 더 버텨주게." 불법체류자의 삶은 곧 도망자의 삶이었다. 중섭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박할 수 없었다. 다음 날, 중섭 가족은 눈물의 생이별을 했다. "아빠가 곧 돌아올게. 그때는 꼭 자전거를 사줄게." 중섭은 너무 울어 얼굴이 새빨개진 아이들과 약속했다. 배에 탄 중섭은 점점 멀어지는 가족을 봤다. 이들이 점보다 작아져 사라질 때까지 봤다. 마사코와 아이들은 끝없이 팔을 흔들었다. 중섭은 이후 죽을 때까지 가족을 만나지 못한다.
이중섭이 마사코에게 보낸 엽서화. |
"오늘은 뭘 그려요?"
"네?" 1939년, 일본 문화학원(文化學院).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중섭의 등을 콕 누르며 물었다. 중섭이 수돗가에서 붓을 씻고 있을 때였다. "저는 야마모토 마사코예요.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미안해요." "괜찮아요." 중섭은 붓을 탈탈 털며 말했다. "제 이름은 이중섭입니다." "그런데요. 별명이 진짜 아고리에요?" 중섭은 눈을 동그랗게 뜬 마사코를 쳐다봤다.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보다시피 제 턱(あご·아고)이 길어서요." 중섭은 자기 턱을 문지르며 씩 웃었다. 마사코도 따라서 웃었다. 중섭은 마사코의 깔끔한 앞머리를 봤다. 곧게 뻗은 등, 장난스러운 미소에서 보이는 흰 앞니도 봤다. "같은 미술부라고요? 정말 몰랐네요." "아고리 상은 늘 친구 무리에 둘러싸여 있으니까. 사실은요. 전 지금 굉장히 용기 내고 있는 거에요." 중섭은 마사코의 손이 떨리고 있는 걸 알았다. 그녀의 두 귀가 차츰 빨개지고 있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혹시 시간 되면…." 이번에는 중섭이 용기를 냈다. 중섭은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게 될 것을 확신했다.
그 시절 중섭은 문화학원 내 인기 스타였다.
중섭은 훤칠했다. 이목구비도 뚜렷했다. 그림도 잘 그렸고, 운동도 잘했다. 중섭은 귀공자 분위기를 풍겼다. 실제로도 중섭은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1916년, 중섭은 평안남도 평원에서 부농(富農)의 아들로 태어났다. 외가 또한 100칸 넘는 집이 있는 재력가였다. 1930년, 열네 살의 중섭은 명문 오산 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때마침 미국 시카고 미술대학과 예일대학을 수석 졸업한 임용련이 부임했는데, 중섭은 그의 스케치 수업에 빠져 미술에 진지하게 입문했다. 중섭은 여러 공모전에서 상을 휩쓸며 재능을 보였다. 임용련은 중섭을 놓고 "미래에 거장이 될 것"이라고 했다. 경제적으로 풍족한 중섭 집안은 이 반짝이는 막내아들에게 더 큰 세상을 안기기로 한다. 1936년, 중섭은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중섭은 자유로운 학풍의 문화학원에 자리 잡았다. 부족함 없이 입고, 아쉬움 없이 먹고 배워왔던 덕에 금세 눈에 띄었다. 그 결과, 어느 햇살 좋은 날에 마사코와 만나 인연을 맺은 것이다. 조심스러운 중섭이 끝내 고백을 못하자 그의 친구가 두 사람만 초대한 뒤 "빨리 할 말 해!"라며 휙 떠났다는 말도 있다.
이중섭이 마사코에게 보낸 엽서화. 이중섭이 상처난 마사코의 발가락을 치료하고 있는 모습을 담았다. |
"아고리는 오늘도 소를 그려요?"
"나는 우직한 소가 우리 민족과 닮았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쭉 그릴 거예요." 중섭과 마사코는 나란히 누워 작업실 천장을 바라봤다. 중섭은 마사코의 앞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마사코는 그런 중섭 쪽으로 몸을 돌려 더 바짝 붙었다. 중섭과 마사코는 결혼을 말할 사이까지 발전했다. 중섭은 마사코의 단정함을 좋아했다. 마사코는 중섭의 진중함을 귀여워했다. 마사코 또한 아버지가 대기업 고위임원진에 속하는 등 집안이 좋았다. 이런 점도 서로에게 묘한 공감대를 줬을지도 모른다. 중섭은 마사코를 '아스파라거스'라고 불렀다. 둘은 바쁜 일정 탓에 아스파라거스 통조림으로 종종 끼니를 해결했다. 중섭은 마사코의 발가락이 하얗고 긴 아스파라거스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중섭을 늘 아고리라고 부른 마사코도 자신만의 애칭이 생긴 게 싫지 않았다.
이중섭, 망월 |
2년 선배였던 중섭이 먼저 졸업했다.
중섭은 자주 볼 수 없게 된 마사코에게 1년에도 80통 넘게 엽서를 썼다. 사랑 편지이자 청혼 편지였다. 중섭은 그사이 화가 입지도 더 굳혔다. 중섭은 일본자유미술가협회 주최의 태양상을 받았다. 일본인도 타기 힘들다는 상이었다. 그가 낸 작품은 '망월'이다. 그림은 슬프다. 처절하다. 일제강점기에 있는 조국의 슬픔, 그런데도 희망을 기원하는 초월적 의지가 느껴진다.
이중섭, 말과 소를 부리는 사람들 |
1943년 8월, 중섭은 다시 고향으로 왔다.
잠깐 전시 준비를 위해 들렀다가 일본으로 출국길이 막혔다는 말이 있다. 당시 미국과 일본 사이 태평양 전쟁이 절정이었는데, 징용을 피해 귀국했다는 말도 있다. 중섭은 어쩔 수 없이 고향에서 그림을 그렸다. 소, 물고기, 달과 새, 연꽃 등 향토적 소재를 화폭에 담았다. 워낙 뚫어지게 관찰한 탓에 소도둑으로 몰린 적도 부지기수였다. 중섭은 저 멀리 있는 마사코에게 계속 사랑의 편지를 썼다. 마사코도 변함없이 애정을 표현했다. 중섭과 마사코는 세상이 더 어지러워지기 전에 결혼해버리기로 했다. 외려 떨어져 있었기에, 둘은 서로가 없으면 제대로 살 수 없다는 것 또한 깨달았다.
1945년, 오직 중섭을 보기 위해 마사코는 목숨을 걸었다.
광복 직전 시기에 겨우 배를 얻어타고 대한해협을 건넜다. 그해 5월, 둘은 원산에서 혼례식을 올렸다. 전쟁이 한창일 때 본토의 일본 여성이 사랑을 찾아 식민지 조선에 온 일, 그 땅에서 식민지의 전통 의상인 한복 차림으로 백년가약을 맺은 일 모두 이례적이었다. 중섭과 마사코의 결혼식은 둘과 안면 없는 사람까지 모여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중섭은 마사코에게 '이남덕'(李南德)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줬다. '남쪽에서 온 덕 있는 여인'이란 뜻이었다. 마사코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억지 결혼에 나섰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훗날 마사코는 "부모님은 '화가로 먹고살 수 있을까'란 걱정만 했을 뿐, 중섭을 조선인이라고 차별한 적이 없다. 아버지는 '딸 바보'였다. 나를 믿어줬다. 먹고살기 힘들면 다시 돌아오라는 말만 했다"라는 말로 사실관계를 바로잡았다.
이중섭, 부부 [국립현대미술관] |
중섭과 마사코는 앞으로 꽃길이 펼쳐지길 바랐다.
부유한 두 집안의 결합이었으니 무리한 생각이 아니었다. 하지만 먼 훗날 둘의 삶 끝 지점에서 돌아보면, 이들 앞에는 긁히고 찢기는 가시밭길뿐이었다. 중섭이 가족과 함께 보낸 시간은 앞으로 약 7년에 불과하다. 중섭과 마사코가 결혼하고 3개월 뒤인 8월15일, 한반도는 광복했다. 기쁨도 잠시, 국토 한가운데 삼팔선이 그어졌다. 중섭이 있던 원산은 북한의 공산 정권에 속했다. 자본가였던 중섭 집안은 곧장 반동으로 내몰렸다. 사업가 기질을 가진 형 중석은 오랜 기간 고초를 겪었다. 중섭은 강제로 공산당 동맹에 가입했다. 감성적 표현을 중시한 중섭에게 공산당 특유의 직선적 화풍은 물과 기름이었다. "정말 맥없다…." 중섭은 공산당 회의를 다녀오면 마사코에게 늘 이렇게 호소했다.
이중섭, 가족과 비둘기 |
이런 불행마저 모두 집어삼킬 만한 더 큰 불행도 찾아왔다.
중섭과 마사코는 결혼 1년 뒤 낳은 첫아들을 거의 바로 잃었다. 디프테리아였다. 중섭은 낙담했다. 이쯤부터 중섭은 소와 함께 '아이들'을 정성껏 그렸다. 예술 활동이자, 먼저 떠난 아들을 기억하고 되새기는 의식이었다. 중섭과 마사코는 이듬해, 그리고 2년 뒤 각각 태현, 태성을 낳아 두 형제를 품는다. 하지만 이들은 너무 빨리 간 첫 아기를 평생 가슴에 묻고 살게 된다. "혼자서는 외로울 거다. 아빠, 엄마가 가기 전에는 '이 친구들'과 맛있는 것 먹으며 놀거라…." 중섭은 관속에 누운 첫째 아들 위에 그림 몇 장을 올려뒀다. 그가 아이들을 그린 초기작 중 제일 잘 그린 그림들이었다. 배를 깐 채 장난을 치고 있는 아이들, 천도복숭아를 양껏 따먹는 아이들 등이 담긴 작품들이었다고 한다.
이중섭, 길 떠나는 가족 |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부잣집 출신이라 요주의 인물로 취급받던 중섭은 중공군(中共軍)이 온다는 소식에 짐을 쌌다. 피란이 시급했다. 가만히 있으면 정말 총살형을 당할 수도 있었다. "어머니, 빨리 가야 해요! 여길 안 떠나면 정말 죽어요!" 중섭은 어머니를 설득했다. "네 형, 중석이가 아직 안 왔다." 어머니는 슬픈 눈으로 중섭을 쳐다봤다. "네 형이 돌아왔는데 다 없으면 얼마나 놀라겠어. 내가 여길 지키마…." 중석은 이미 완장꾼들에게 부르주아로 몰려 비참한 최후를 맞은 후였다. 이 사실을 아는 중섭은 할 말을 잃었다. 그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어머니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했다. 중섭은 자기 그림 대부분을 어머니에게 안겼다. 그렇게 막내아들이 곧 돌아올 테니 그림을 잘 부탁한다며 안심시켰다. 행여나 못 돌아오더라도, 나라가 잠잠해진 뒤 팔면 종잣돈은 될 것이었다. 희망은 희망일 뿐이었다. 중섭은 앞으로 죽을 때까지 어머니를 보지 못한다. 그는 마사코와 두 아들을 데리고 떠났다. UN군 수송선을 탔다. 도착한 곳은 부산이었다.
이중섭, 밤과 까마귀 |
중섭은 막막했다.
이곳은 낯선 땅이었다. 늘 차고 넘친 돈이 없다. 몸을 기댈 친척도, 지인도 없다. 일단 밥벌이를 해야 했다. 생이 그림보다 먼저였다. 그날 밤 가족이 모여 먹을 수 있는 밥과 반찬이 시급했다. 도련님이 막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중섭은 종종 부둣가에 나갔으나 돈벌이는 시원치 않았다. 가끔은 푼돈을 받고도 "얼마 전 폐를 끼친 아무개에게 고마움을 표한다고…"라며 텅 빈 주머니로 돌아왔다. 마사코는 속이 터졌다. 하지만 이 가엽고도 순진한 남편을 무턱대고 탓할 수 없었다.
마사코가 직접 팔을 걷었다.
광장에서 재봉질을 했다. 받은 푼돈으로 아이들 밥을 해 먹였다. 훗날, 중섭과 가까웠던 화가 황염수의 아내 남경숙은 당시 마사코를 회상하며 "(그 시절)중섭은 정말 무능하고 나쁜 남편이었다"고 분노노하기도 했다. 그만큼 마사코는 처절하게 바느질을 했다. 중섭의 가족이 몸을 둔 집은 비좁았다. 공기는 탁했고, 바닥은 차가웠다. 이들은 온갖 옷과 천을 다 껴입고 잤다. 그런데도 추워 신음했다. 중섭은 고향의 더운 방에서 온 가족이 홀딱 벗고 자던 그때를 떠올렸다. 어쩌면 마사코도, 어쩌면 두 아들도 그 시절을 추억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중섭, 서귀포의 환상 |
"서귀포로 가보셔. 서귀포 칠십 리에 물새가 운다는 노래도 있지 않소."
온 세상 피란민이 다 몰려드는 부산을 뒤로하고 제주도로 온 중섭 가족은 한 노인의 권유를 듣고 서귀포로 갔다. 그냥 몇 날 며칠을 걸었다. 도착했을 때는 거의 거지꼴이었다. 서귀포의 알자리 동산마을 반장인 송태주·김순복 부부가 이들을 딱하게 여겨 본인들의 집 곁방을 내어줬다. 1.4평짜리 방이었다. 중섭은 이들이 고마웠다. 중섭 가족은 1951년 봄부터 겨울까지 근 1년간 이 방에서 옹기종기 지낸다. 배고프고, 비루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훗날 중섭은 이 시기가 가족과 함께 보낸 가장 행복하고 풍요로운 때였다고 추억한다.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허나 아름답도다"라는 시를 쓸 정도였다.
이중섭, 그리운 제주도 풍경 |
서귀포에 새롭게 둥지를 튼 중섭 가족은 한라산에서 뜯어온 부추를 씹어먹었다.
그것마저 떨어질 때는 바다로 갔다. 게를 잡았다. 아장대는 녀석들을 굽거나 찌면 한 끼 식사였다. 아이들은 놀이하듯 게를 잡고, 건지고, 쫓아갔다. 자빠지면 그대로 까르르 웃었다. 중섭과 마사코는 이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이 순간만큼은 눈물겹게 행복했다. 중섭은 가족과 떨어지게 되는 가까운 미래에 '그리운 제주도 풍경'을 그리게 된다. 삶이 휘청일 때마다 꺼내먹고, 또 꺼내먹은 추억을 화폭에 담았다. 벌거벗은 아이들이 게와 씨름하듯 놀고 있다. 이를 보는 중섭과 마사코는 아무 걱정이 없는 듯하다. 중섭은 아이만큼 게도 정성껏 그렸다. 중섭은 종종 게를 너무 많이 잡아먹는다며 이들에게 미안함을 말하곤 했다. 서귀포 생활이 익숙해질 때쯤 중섭은 가끔 마을 언덕에 올라 섶섬을 봤다. 섶섬은 포화에서 벗어나 거짓말처럼 평화롭게 두둥실 떠 있었다. 초연함을 되새길 수 있었다.
이중섭, 섶섬이 보이는 풍경 [이중섭미술관] |
중섭은 밝은 미래를 꿈꿨다.
소일거리도 하나둘 들어왔다. 이제 전쟁만 사라지면 바랄 게 없었다. 이쯤 뭍에서 반가운 소식이 닿았다. 전쟁이 곧 끝날지도 모른다고 했다. 중섭은 부푼 꿈을 안았다. 마사코, 아들들과 함께 다시 부산으로 갔다. 중섭은 땅을 밟자마자 절망했다. 소문은 가짜였다. 전쟁은 끝나기는커녕 교착 상태였다. 나라는 여전히 불안했다. 도시는 아직도 혼란스러웠다. 중섭 가족을 맞이한 건 한파와 빈곤뿐이었다. "여보, 괜찮소?" 중섭은 그쯤부터 마사코에게 이상함을 느꼈다. 마사코는 자꾸 기침을 했다. 입에 댄 손수건에 피가 묻어나오기도 했다. "아고리. 여긴 너무 추워요." 마사코는 폐결핵에 걸렸다. 요 며칠 풀죽만 먹인 아이들의 상태도 좋지 않았다. 눈에 띄게 야위었다. 계속되는 피란, 끈질기게 따라붙는 가난이 모두에게 죽음의 그림자를 씌우는 중이었다. 1952년, 마사코와 아이들은 일본으로 갔다. 요양을 위해서였다. 그쯤 장인도 사망했기에, 더더욱 가야했다. 그래도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린 마사코에게 대고 중섭이 설득했다는 말이 있다.
이중섭, 마사코에게 보낸 편지 일부 [국립현대미술관] |
단잠 같은 일주일을 보낸 뒤 돌아가는 중섭은 가족이 점이 돼 사라진 후에야 꺽꺽 울었다.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듯했다. 억지를 쓰더라도 남아있을 것을 수백번 후회했다. 친구들도 "왜 바보같이 돌아왔느냐"며 안타까워했다. 이제 중섭의 희망은 하나였다. 빨리 그림을 그려 전시회를 열고, 돈을 잔뜩 벌어 가족과 다시 같이 사는 것이었다. 한국 땅을 밟은 중섭은 떠돌이 생활을 했다. 하루를 벌어 하루를 살았다. 막일을 하면서도 잡지에 실을 삽화 등 그림은 꼭 그렸다. 중섭은 소와 게, 가족 등을 소재로 삼았다. "끝없이 훌륭하고, 끝없이 다정하고, 나만의 아름답고 상냥한 천사여. (…) 더욱 힘을 내 더욱 건강하게 지내주오. (…) 내 사랑하는 아내 남덕 천사 만세, 만세." "아빠는 온종일 태현이와 태성이, 엄마가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어요. 곧 만날 생각을 하니, 아빠는 너무 즐거워요." 그쯤 가족이 너무 보고 싶어 편지도 많이 썼다. 내용은 희망으로 가득했다. 중섭은 글과 함께 그림도 곁들였다. 두 아들이 그림을 놓고 싸울까 봐 같은 그림을 두 장씩 그려줬다. 편지지 가장자리 사방팔방에 '뽀뽀'라는 말을 써놓기도 했다.
이중섭, 흰소 |
이중섭, 흰소 |
슬픔은 아름다움을 낳는다.
지인 도움으로 1954년까지 통영에 머문 중섭은 필생의 걸작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중섭은 '소' 연작과 '부부' 연작, '길 떠나는 가족' 등 그림을 내놓았다. 모두 한국 미술사의 대표작이 될 작품들이었다. 화구를 살 돈도 없던 중섭은 양담배 은박지를 모았다. 길거리를 나뒹구는 이 은박지를 모아 못으로 그림을 그렸다. 이른바 은지화(銀紙畵)다. 중섭은 은빛으로 반짝이는 마사코와 아이들을 보며 그리움을 삼켰다. 하지만 중섭에게 세상은 끝까지 가혹했다. 중섭은 1955년 서울 미도파 화랑에서 개인전을 치렀다. 마지막 혼을 갈아 넣은 행사였다. 미술계의 평은 좋았다. 작품성이 넘실거린다고 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많은 이가 그의 그림을 외상으로 가져가곤 값을 보내지 않았다. 난리를 틈타 그림을 훔쳐가는 이도 있었다. 전시는 상처뿐인 영광만을 안겨줬다. 뒤이어 대구에서 연 전시는 반응마저 싸늘했다. 그의 은지화에는 싸구려 춘화(春畫)라는 딱지도 붙었다.
이중섭, 싸우는 소, 1954 |
이중섭, 싸우는 소, 1955 |
그 사이 마사코도 중섭을 위해 노력했다.
마사코는 중섭 모르게 사업을 벌였다. 중섭의 오산학교 후배에게 일본 서적을 외상으로 사주고, 이를 팔아 이윤이 나면 일부를 받는 일이었다. 너무 쉬운 일이었다. 너무 단순한 일이었다. 그래서 사기였다. 그 후배는 돈을 제대로 주지 않았다. 횡령한 뒤 꿀꺽 삼켰다. 마사코는 거액의 빚을 졌다. 앞으로 20년 이상 삯바느질을 해야 할 만큼 타격을 입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중섭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중섭도, 마사코도 빈털터리였다. 희망은 모래알처럼 빠져나갔다. 중섭의 1954년 작품 '싸우는 소'를 보면 어떻게든 온 힘을 다해 맞서려는 투지의 소가 보인다. 1년 뒤 중섭이 다시 그린 '싸우는 소'는 힘없이 고꾸라지고 있는 소 뿐이다.
이중섭, 돌아오지 않는 강 |
끝이었다. 모든 게 끝이었다.
중섭은 무너졌다. "작업에 몰두하며 어떻게 하면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지 온통 그 생각뿐이라오"라던 편지를 쓰던 중섭은 모든 것을 내려놨다. 이젠 아내가 보낸 봉투를 뜯지도 않았다. 중섭은 생애 마지막 그림을 그렸다. 한 남성이 남루한 집 창틀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저 멀리에 광주리를 진 한 여성이 있다. 서 있는지, 다가오고 있는지, 멀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종이에 찍힌 얼룩은 눈물 자국 같다. 중섭이 그 시절 상영하던 영화 '돌아오지 않는 강' 포스터를 보고 제목에 영감을 받아 그린 절필 작이다. 제목은 똑같이 '돌아오지 않는 강'으로 지었다.
이중섭, 부부(은지화) |
이중섭 |
2012년 11월 제주 서귀포시 이중섭미술관에서 야마모토 마사코 여사 [연합] |
중섭은 조금씩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그의 꿈에선 북한에 두고 온 어머니와 일본에 가 있는 마사코가 번갈아 나타났다. 중섭은 자신에 대해 실패한 가장이라고 했다. 자기가 대단한 예술가가 될 것처럼 세상을 속였다며 가슴을 퍽퍽 쳤다. 중섭은 밥을 아예 끊었다. 거식증에 걸린 그는 물만 마셔도 토할 만큼 몸이 상했다. 중섭은 청량리정신병원 무료 입원실에 입원했다. 그곳에서 간염 진단을 받은 그는 곧 서울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다. 중섭은 1956년 9월6일 무연고자로 생을 마쳤다. 중섭의 시신 곁에는 병원비 독촉장이 다였다고 한다. "사랑하는 마사코, 정말 외롭구려. 소처럼 무거운 걸음을 옮기며 안간힘을 다해 그림을 그리고 있소." 죽기 얼마 전 마사코에게 보낸 엽서 한 장이 유언이 됐다. 마사코는 중섭이 죽은 후 평생 수절(守節)하다 지난해 8월13일에 노환으로 별세했다.
〈후암동 미술관 이론 편 읽는 순서〉
1)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 르네상스 선구자(2022. 7. 2.)
2)뻥 아냐, 600년전인데 이 정도 ‘입체 그림’ 있었다[후암동 미술관-마사초 편] - 원근법 선구자(2022. 8. 27.)
3)세계서 가장 유명한 이 ‘레이저 눈빛’, 그것은 사랑?[후암동 미술관-얀 반 에이크 편] - 유화 선구자 (2022.5.21.)
4)‘레드벨벳’도 춤추게 한 이 화가의 정체…"악마의 아들? 나 원 참" [후암동 미술관-보스 편] -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5.28.)
5)아리따운 금발 여인, 외간남자 목을 베고 있는거야?[후암동 미술관-카라바조 편] - 바로크 선구자 (2022.6.11.)
6)아름다운 여인, 끌어안고 난리난 옆 커플이 부러워[후암동 미술관-와토 편] - 로코코 선구자(2022.10.8.)
7)맨몸 여인들, 전쟁 뛰어들어 “그만!” 사자후…싸움 막았다[후암동 미술관-다비드 편] - 신고전주의 선구자 (2022.10.15.)
8)표류 D+13, 왜 몰랐지? 뗏목 위 널린 게 먹을건데[후암동 미술관-테오도르 제리코 편] - 낭만주의 선구자 (2022.5.14.)
9)“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 사실주의 선구자 (2022.5.7.)
10)“관상가 양반 아니었어?” 조선의 ‘얼굴’, 몰랐던 사실[후암동 미술관-윤두서 편] - 사실주의 특별 편 (2022. 11. 19.)
11)벌거벗은 이 여자, 뭐 때문에 빤히 쳐다보나[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2022. 4. 23.)
12)“못 그렸는데 폼만 잡아” 욕먹던 이 그림, 3300억이요? [후암동 미술관-클로드 모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⑵ (2022.4.30.)
13)‘점투성이’ 수상한 커플 정체는? [후암동 미술관-조르주 쇠라 편] - 신인상주의 선구자 (2022. 6. 25.)
14)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 표현주의 선구자 (2022.6.4.)
15)이 ‘사과’ 때문에 세상이 뒤집혔다, 도대체 왜?[후암동 미술관-폴 세잔 편] - 근대 회화 선구자(2022. 7.9.)
16)‘생각하는 사람’ 진짜 정체, 남모를 사정도 있었다[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로댕 편] - 근대 조각 선구자 (2022. 10. 22.)
17)화끈한 키스, ‘이 여성’ 사르르 녹아내리다[후암동 미술관-구스타프 클림트 편] - 분리파 선구자 (2022. 8. 13.)
18)나체 여인, 어쩌다 사자 득실대는 정글 한복판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루소 편] - 근대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 7. 30.)
19)헐크색 피부 갖게 된 ‘이 여성’…이 놈의 ‘남편’ 때문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마티스 편] - 야수주의 선구자 (2022. 7. 16.)
20)잘생긴 법학 교수님, ‘이것’ 그렸더니 미술계 '발칵'[후암동 미술관-바실리 칸딘스키 편] - 추상회화 선구자 (2022.7. 23.)
21)“이건 나도 그리겠다!” 1순위 그림, 그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몬드리안 편] - 추상회화 선구자⑵ (2022. 8. 6.)
22)스파게티 면발? 1315억에 팔린 그림, 충격적 이유[후암동 미술관-잭슨 폴록 편] - 액션페인팅 선구자 (2022. 10. 29.)
23)몸 좋은 보디빌더, 거대 막대사탕 들고 ‘의문의 포즈’[후암동 미술관-리처드 해밀턴 편] - 팝아트 선구자 (2022.11.12.)
24)“동양서 ‘테러리스트’가 왔다” 피아노 다 때려부쉈다[후암동 미술관-백남준 편] - 비디오 아트 선구자 (2022.11.26.)
〈후암동 미술관 인물 편 읽는 순서〉
1)"아내·자식·명예 다 잃었다"…그런데 왜 '빵' 터지셨어요[후암동 미술관-렘브란트 편] - 빛의 마술사 (2023. 1. 7.)
2)미녀만 보면 그리려고 안달났다, 왜 그랬나 보니[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르누아르 편] - 행복을 그린 화가 (2022. 12. 24.)
3)“고갱 그놈, 도대체 왜 그래?” 악마인지 ‘악마의 재능’인지[후암동 미술관-폴 고갱 편] - 고귀한 야만인 (2022. 12. 3.)
4)“백번은 넘게 봤겠다” 모두 아는 ‘이 절규’의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에드바르 뭉크 편] - 노르웨이의 현자 (2022. 12. 31.)
5)“이놈의 짧은 다리 때문에” 카바레 스타의 영광과 몰락[후암동 미술관-툴루즈 로트레크 편] - 작은 거인 (2022. 12. 17.)
6)눈동자 없는 기괴한 여자 그림, 알고 보니[후암동 미술관-모딜리아니 편] - 파리의 귀공자 (2022. 12. 10.)
7)“로댕 아이를 뱄다” 폭탄선언 여성, 30년 수용소에 갇혔다[후암동 미술관-카미유 클로델 편] - 천재와 맞선 천재 (2022. 11. 5.)
8)당신은 모르실거야, 키스하는 두 사람 왜 이 꼴인지[후암동 미술관-르네 마그리트 편] - ‘진짜’ 괴짜 (2022. 9. 3.)
9)피카소도 ‘이 그림’에 “대박!” 감탄, 각성했다는데[후암동 미술관-피카소·마티스 편] - 영원한 라이벌 (2022. 9. 10.)
10)3번 유산·35번 수술의 악몽…그럼에도, 인생이여 만세[후암동 미술관-프리다 칼로 편] - 고통의 여왕 (2023. 1. 14.)
11)“내 천사여” 편지 사방팔방에 ‘뽀뽀’…한 무연고자의 죽음[후암동 미술관-이중섭 편] - 아고리, 나의 아고리 (2023. 1. 21.)
12)권총도 채찍도 버텼는데, ‘이 남자’ 행동에 무너졌다[후암동 미술관-마리나 아브라모비치 편] - 우아한 전사 (2022. 8. 20.)
〈후암동 미술관 현장 편 읽는 순서〉
1)이건희 컬렉션, 이 ‘다섯 작품’ 놓치지 마시라[후암동 미술관-‘어느 수집가의 초대’ 출장 편] - 전시 특집 (2022. 6. 18.)
2)알코올 중독 ‘이 남자’, ‘파리’에 미치자 놀라운 일 터졌다[후암동 미술관-몽마르트 언덕 편] - 동행자 : 모리스 위트릴로 (2022. 9. 17.)
3)고흐 “슬픔은 왜 나한테만” 펑펑 울었다, 고작 2평 다락방에서[후암동 미술관-오베르 편] - 동행자 : 빈센트 반 고흐 (2022 9. 24.)
4)모네 “앞이 안 보여도 상관없어”…백내장도 못 막은 그의 ‘최후작’[후암동 미술관-지베르니 편] - 동행자 : 클로드 모네 (2022. 10.1.)
yul@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