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 文 전 대통령 ‘이재명 외에 대안도 없으면서’ 발언 공개
비명계 이상민 의원 “우리가 文 전 대통령 부하냐” 공개비판
친문계도 “文 전 대통령, 현실정치 끌어 들여서는 안돼” 강조
문재인 전 대통령(오른쪽)과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 [박지원 페이스북] |
[헤럴드경제=홍석희 기자]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게 ‘보은(報恩)’했다. 당 내 이 대표에 대한 ‘대표직 사퇴’ 목소리를 잠재우기 위해 문재인 전 대통령의 발언을 공개하며 문 전 대통령을 ‘당 내홍’에 끌어들인 것이다. 이 대표는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말 박 전 원장의 ‘복당’을 결정한 바 있다. 종합하면 이 대표는 ‘복당’을 박 전 원장에게 선사했고, 박 전 원장은 퇴진 요구에 시달리는 이 대표에게 ‘문재인의 선물’을 내린 셈이다. ‘비명계’에서는 박 전 원장은 물론 문 전 대통령까지 비판하고 나섰다.
박 전 원장의 문제의 발언은 지난 17일 오전 YTN 라디오 인터뷰에서 나왔다. 박 전 원장은 사회자가 ‘최근 문 전 대통령을 만났을 때 어떤 얘기를 했느냐’는 질문에 “문재인 대통령께서는 지금 현재 민주당이 총단합해서 잘해야 된다고 말씀하셨다”며 “문 전 대통령이 ‘잘해야 되는데 그렇게 나가면 안 된다. 지금 이재명 대표 외에 대안도 없으면서 자꾸 무슨…’ 그 정도 얘기를 했다”고 전했다. 앞서 박 전 원장은 지난 10일 문 전 대통령의 경남 양산 사저를 방문했다.
박 전 원장은 최근 민주당 내에서 이 대표를 둘러싼 내홍과 관련해 “지금 사퇴론은, 질서 있는 사퇴 등 그러한 것은 상당히 후퇴됐다”며 “현저히 줄었고 이제 ‘미래로 좀 잘 가자’ 하는 것이 훨씬 지배적인 의견이라 보고 있다”고 강조했다. 박 전 원장은 또 최근 이 대표 강성 지지자들에 대해서도 “그분들도 자제해야 한다. 친명과 비명으로 나눠 싸우고 개딸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건 여권의 총선 전략에 말려드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박 전 원장이 문 전 대통령과 만나 사담한 것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특히 ‘대안이 없다’는 지적은 이 대표 퇴진을 요구하는 측의 가장 아픈 취약지점이기도 하다. 또 문 전 대통령은 직전 대통령이자 민주당 내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이며 여전히 당내 최대 계파인 ‘친문계’의 리더다. 민주당 내 문재인 청와대 출신 의원들 역시 줄잡아 십수명에 이른다. 그런데 박 전 원장이 문 전 대통령의 발언을 공개하면서 사실상 이 대표 체제 유지에 힘을 싣는 발언을 한 것이다.
당장 ‘비명계’에선 박 전 원장은 물론이고 문 전 대통령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5선의 이상민 민주당 의원은 17일 밤 CBS라디오 ‘박재홍의 한판 승부’에서 박 전 원장의 발언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이 과도하게 말씀하신 거고 전달한 분도 잘못 전달했다”고 비판했다. 이 의원은 “우리가 뭐 문재인 대통령 부하입니까. 문 대통령이 지시하면 그대로 다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게”라고 말했다. 이 의원은 “그냥 퇴진하면 되지, 질서 있는 퇴진이 뭐냐”며 “딱 전격적으로 그만둬야 진정성이 와닿는다”고 했다.
이 의원은 “전직 대통령으로서 얘기하는 건 좋은데 해야 될 말이 있고 안 해야 될 말이 있다. 이재명 대표 말고는 대안이 없다는 건 문 대통령 판단인데 그런 얘기를 그렇게 막 하시면 안 된다”며 “설사 그 얘기를 문재인 대통령하고 박지원 원장 사이에 했어도 이를 밖에다가 말 할 일은 아니다. 전직 대통령 말을 이렇게 막 전하면 되겠는가”라고 했다. 이 의원은 이어 “대통령 혹은 전직 대통령과의 말씀은 상당 부분 밖에 얘기하면 안 된다. 문재인 대통령의 뜻이 그러니까 아무 소리 마라 이런 지침으로 들리는데 더 모욕적”이라 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문재인 전 대통령 [연합] |
박 전 원장을 통해 문 전 대통령의 발언이 외부에 공개되면서 당분간 문 전 대통령이 실제로 ‘이재명 외에 대안이 없다’고 말을 했었는지를 확인키 위한 움직임도 가시화 될 것으로 보인다. 당내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인 문 전 대통령의 ‘진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의사 타진도 계속될 전망이다. 문 전 대통령은 올해 1월 신년을 맞아 이 대표가 경남 양산 사저를 예방했을 때도 “이 대표를 중심으로 민주당이 뭉쳐 민생과 경제를 해결하는 데 노력을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한 바 있다.
소위 ‘정치 9단’ 박 전 원장이 문 전 대통령의 발언을 전언 형태로 공개한 것은 사실상 이 대표에 대한 ‘보은’ 성격이 짙다는 평가가 많다. 박 전 원장은 문 전 대통령이 당대표 시절이던 지난 2016년 민주당을 탈당했다. 박 전 원장은 국민의당으로 당적을 옮겼고 이후 6년만에 다시 민주당 복당이 허락됐다. 박 전 원장의 복당엔 반대가 심했다. 특히 정청래 최고위원은 비공개 회의에서 박 전 원장 복당을 강하게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결국 이 대표가 박 전 원장의 복당을 결정했고, 정 최고위원도 결국엔 ‘당의 뜻에 따를 것’이라며 한발 물러선 바 있다.
박 전 원장 본인 입으로도 누차 언급한 ‘정치 인생중 가장 큰 실수’였던 민주당 탈당에 대해 이 대표가 ‘복당 결정’으로 정치적 사면을 해준 셈이 되게 됐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민주당 관계자는 “박 전 원장의 민주당 복당에 대해선 대다수가 반대했다. ‘또 배신할 사람’이란 비판이었다. 그런데 이 대표가 ‘복당시키자’고 해서 결국 복당이 허락된 것”이라며 “영향력이 큰 ‘빅마우스’인 박지원을 당 바깥에 두기 보다는 당내에 두면 이 대표에게 여러 측면에서 유리할 것이란 셈법도 가미된 것으로 안다”고 했다.
문 전 대통령이 이 대표 거취 문제에 대한 언급이 공개되면서 ‘친문계’측 반응도 주목된다. 한 친문계 의원은 헤럴드경제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당 문제에 대해 문재인 전 대통령을 끌어들여서는 절대 안된다고 생각한다”며 “대통령은 스스로 평산 마을에 내려 가셨을 때 현실 정치에 관여치 않겠다는 의사가 매우 강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시국을 해결하기 위해 대통령을 끌어들이는 것은 정말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지난 2021년 6월4일, 국가정보원에서 열린 국정원 원훈석 제막식에서 박지원 전 국정원장과 함께 개정된 국정원법을 새긴 동판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청와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