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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체女에 웬 아프리카 가면?” 얼빠졌다 조롱당한 그의 ‘반전’[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파블로 피카소 편]
입체파 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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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여졌습니다.
파블로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일부)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마티스. 뭘 보고 계셨어요?"

"내가 뭘…. 크흠!"

1906년, 프랑스 파리. 화가 파블로 피카소가 인생 선배이자 라이벌인 앙리 마티스 앞에 불쑥 나타났다. "막 뭘 감추지 않았어요?" 피카소는 끈질겼다. 그는 마티스에게 슬금슬금 다가갔다. "아니, 그냥…. 아프리카 가면이야. 시시한 조각일세." 마티스는 무릎 밑에 내려둔 가면을 다시 쥐었다. "이걸로 또 어떤 작당 모의를 하려고요?" "무슨 그런 말을! 벼룩시장에서 산 잡동사니 중 하나야." 마티스가 헛기침을 했다. "…이봐. 나는 이제 가야 해. 그 가면, 쓰든 버리든 알아서 해." 피카소는 엉겁결에 가면을 받았다. 그는 이 특이한 물건을 들고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마티스는 그런 피카소를 두고 예술가 사랑방인 거트루드 스타인 집에서 벗어났다. "제발 그냥 버려." 마티스는 혼잣말을 했다. 빌어먹을 자식, 부디 저 가면에선 어떤 영감도 얻지 않기를. 마티스는 기도했다.

파리 몽마르트 언덕의 작업실에서 앉아있는 파블로 피카소. 벽면에 아프리카식 조형물이 있다.

마티스의 바람과 달리 피카소는 눈을 번뜩였다.

피카소는 달렸다. 트로카데로 민족학 박물관 문을 열었다. 특이한 가면, 강렬한 패턴의 옷, 먼지 쌓인 인디언 인형과 토템…. 피카소는 마티스의 아프리카 가면을 본 뒤 묘한 통증을 느꼈다. 그는 그 가면과 닮은 온갖 전시품에 둘러싸인 후에야 이 욱신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창작욕이었다. 낯선데 신선한, 희귀한데 도발적인 무언가를 만들고픈 욕망이었다. 그간 왜 몰랐을까. 피카소의 머릿속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완전히 혼자였다. 그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그러지 못했다. 나는 계속 거기에 있었다.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인지했다." 훗날 피카소는 당시를 이렇게 돌아본다. "주물(呪物·원시종교에서 신성시하는 물건)들을 보던 중 알았다. 나는 모든 관습에 반(反)하는 인간이라는 점을." 그는 자신이 지독한 반항아였음을 다시 깨달았다.

피카소는 이제 어디에 홀린 사람 같았다.

피카소는 먼지가 폴폴 날리는 자기 작업실로 돌아왔다. 널브러진 쓰레기를 뻥뻥 차며 화구 앞에 섰다. 그는 종일 틀어박혀 그림을 그렸다. "때려 부숴야 해. 파리에서 그간 없던 것을 만들어야 해!" 피카소는 종종 소리를 질렀다.

파블로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www.PabloPicasso.org]

"내 작품을 보러 오게."

1907년, 피카소는 친구들을 작업실에 초대했다. 피카소는 의기양양했다. "바로 이것일세!" 피카소가 친구들 앞에서 장막을 걷었다. 야심작이었다. 그런데 그림이…. 친구들은 굳었다. 당혹감에 손뼉도 치지 못했다. 눈앞에는 2.5㎡는 돼 보이는 거대한 그림이 있었다. 그 안에 보이는 건 벌거벗은 여성 다섯 명이었다. 나체 여인을 그린 단체화쯤이야 그럴 수 있었다. 문제는 화풍이었다. 여성들은 기괴했다. 아프리카 가면을 닮은 얼굴, 뾰족한 가슴, 거친 다리에선 벨 에포크(bellepoque·19세기 말~20세기 초 프랑스가 누린 풍요와 평화)식 아름다움은 전혀 없었다. 아프리카 느낌의 원시적 투박함 뿐이었다. 이 도발적인 여인들은 한 면 위에 마구 뒤섞였다. 원근법조차 구현하지 않은 셈이다. 그뿐인가. 그림 속 시점(視點)도 하나가 아니었다. 앞에서 본 여성, 옆에서 본 여성, 비스듬히 본 여성 등이 한 캔버스에 마구 욱여넣어져 있었다. 그림 밑에 놓인 과일은 위에서 본 시점으로 그려졌다. '아비뇽의 처녀들'. 제목까지 파격적이었다. 아비뇽은 당시 홍등가로 유명했다. 대놓고 매춘부를 그렸다고 밝힌 격이었다.

'재능 있는 친구가… 거듭 고민하더니 끝내 미쳤군. 찢어지게 가난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가?'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생각했다. 마티스를 무리하게 따라잡으려다 선을 넘었군. 그는 산산이 부서진 그림 속 형상처럼, 피카소의 예술 인생도 산산이 박살날 것으로 확신했다. 지금껏 파리에서 나온 '좋은 그림'과 비교하면 주제, 구도, 기법 모두 엉망이었다. 반응은 다들 비슷했다. 멍청한 그림, 불쾌한 작품 등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화단에서 별종 취급을 받던 마티스조차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떨떠름해했다. 내가 이 그림을 그리려고 얼마나 많은 영감을 쏟아부었는데! 피카소는 혹평에 분노했다. 그냥 화실 한구석에 처박아 놓았다. 이날은 의욕 넘친 젊은 화가가 무리수를 선보인 날로 잊히는 듯했다. 당시 그 자리에 선 거의 모든 사람은 몰랐다. 이 그림이 현대미술의 기수, 입체주의 문을 연 최초 작품으로 꼽히게 될 줄은.

태어나 처음 한 말이 ‘연필’…반항아가 되다
파블로 피카소, 토르소 소묘

피카소가 세상 빛을 보고 처음 깨우친 말은 'piz'였다.

스페인어로 연필, 흑연을 뜻하는 'lápiz'의 줄임말이었다. 피카소는 1881년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말라가에서 태어났다. 피카소는 말도 배우기 전에 그림을 그렸다. 화가 아버지 호세 루이스의 지도로 실력을 쌓았다. 집안이 나름 중산층이라 더 수월히 관심을 쏟았다. 화가로의 내 꿈을 대신 이룰 수 있을 천재성이잖아…. 피카소가 13살에 그린 스케치를 엿본 아버지는 이렇게 생각했다. 앳된 아들 녀석이 자신을 한참 뛰어넘었음을 깨달았다. 평생 든 붓을 꺾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이미 12살쯤 라파엘로 산치오처럼 그렸다." 훗날 피카소는 이렇게 말한다. 꽤 건방진 말이다. 하지만 그가 11살에 그린 토르소 소묘를 보면 아예 허풍은 아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엘 그레코, The Vision of Saint John

피카소는 동시대 사람의 가르침이 시시했다.

피카소는 바르셀로나 미술학교에 최연소로 입학했다. 고작 14살이었다. 그는 늘 1등이었다. 과제는 항상 며칠 만에 완성했다. 남들이 1개월은 쏟아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뭐 이런 애가 다 있어?" 교직원들은 웅성댔다. 피카소는 상급반으로 옮겨졌다. 거기서도 계속 1등을 했다. 월반을 거듭한 피카소는 마침내 마드리드 왕립 미술학교 문을 두드렸다. 스페인 최고 명문이었다. 겨우 16살 때였다. 피카소는 기대로 부풀었다. 하지만 이는 곧 실망으로 바뀌었다. 피카소는 또 배울 게 없었다. 다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아카데미풍 고전주의 따위야 이미 최고 경지였다. 피카소는 옛 거장에게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수업을 빼먹었다. 대신 프라도 미술관을 찾아갔다. "이게 진짜 그림이야!" 피카소는 그 시절 천재였던 프란시스코 고야, 디에고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반 레인의 그림을 보고 들떴다. 이들의 혼을 되새기며 열심히 베껴 그렸다. 피카소는 특히 엘 그레코의 그림을 보고 감동에 북받쳤다. 그는 죽을 때까지 엘 그레코 특유의 일렁이는 형상, 신비로운 분위기를 즐겨 쓰게 된다.

피카소는 반항의 맛을 알아버렸다.

알아서 결정하고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때 따라오는 성취감은 불안함보다 훨씬 크고 황홀했다. 물론 그가 천재였기에 가능한 결과지만, 인류 천재 중 자기 목소리 한 번 내지 못한 채 스러진 이들도 셀 수 없이 많다. 피카소는 학교에 반항하고, 이어 선배 화가인 아버지에게 반항했다. 아카데미풍 그림을 높게 친 아버지에게 그따위 화풍은 재미도 없고 도움도 안 된다고 받아쳐버렸다. 피카소는 꼿꼿한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 또한 여러 희생으로 명문 학교에 보낸 아들의 돌발행동을 용납할 수 없었다. 둘은 반목했다. 피카소는 아버지의 성 '루이스'를 버렸다. "네가 무엇이 되든 항상 최고다"라며 믿어준 어머니 마리아 피카소의 성을 따랐다. 그래서 그는 파블로 루이스가 아닌, 파블로 피카소로 알려지게 된다. 피카소는 반항을 이어갔다. 그는 곧 '그림은 대상을 그대로 그려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했던 미술화풍에 반항한다. 나아가 안정을 찾고 싶어하는 자기 인생에는 저항한다.

파블로 피카소, 첫영성체
파블로 피카소, 과학과 자애 [www.PabloPicasso.org]

피카소의 반항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피카소는 15살에 '첫영성체'를 그렸다. 엄숙한 분위기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빛의 강약 조절, 옷의 주름, 천과 양탄자의 보풀도 완벽하게 표현했다. 그다음 해에는 '과학과 자애'를 완성했다. 이 그림 또한 인물 배치와 구도, 꽉 채운 밀도감에서 더는 손댈 게 없어보인다. 그림 한 장뿐인데도 온갖 절절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피카소는 20살도 전에 이런 그림을 그렸다. 그는 이미 무엇이든 그릴 수 있었다. 친구들이 아직 문법과 간단한 계산식을 배울 때 그는 그 시대의 미술을 정복했다. 어디에서 뭘 고분고분 따르기엔 답답함에 열불이 나 그럴 수 없었다.

청색시대, 장미시대 건너…새로운 도전
파블로 피카소, The Death of Casagemas [www.PabloPicasso.org]

그곳은 진득하고 쾨쾨했다.

1900년, 피카소는 프랑스 파리로 왔다. 몽마르트 언덕이었다. 19살일 때였다. 미술학교 단짝 카를로스 카사헤마스와 더 큰 세상으로 달려왔다. 피카소는 자신만만했다. 벌써 그림도 3점이나 팔았다. 스페인 유명 공모전을 정복한 그는 여기서도 1등 화가가 되리라고 확신했다. 그런 피카소는 곧 충격에 휩싸였다. 친구 카사헤마스가 대형 사고를 쳤다. 카사헤마스는 모델이자 세탁부로 일한 여성 로르 플로랭탱을 좋아했다. 짝사랑이었다. 카사헤마스는 결심했다. 그는 몽마르트의 카페에 사람들을 모은 뒤 플로랭탱에게 고백했다. 플로랭탱은 질색했다. 카사헤마스는 그녀의 떨떠름한 표정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주머니에서 꺼낸 건 총이었다. 카사헤마스는 플로랭탱을 향해 총을 쐈다. 이어 총알이 빗나간 일도 모른 채 극단적 선택을 했다.

파블로 피카소, The Old Guitarist [www.PabloPicasso.org]

이 소식을 들은 피카소는 정신을 못 차렸다.

그가 이렇게나 죄책감을 느낀 데 대해선 여러 추측이 있다. 피카소가 카사헤마스의 최후를 짐작하고서도 설마하며 외면했다는 설, 사실은 피카소가 그간 카사헤마스와 플로랭탱 관계에 훼방을 놓았다는 설 등이다. 피카소는 슬픔에 젖었다. 그는 3년여간 우울한 그림만 그렸다. 음울한 청색을 잔뜩 찍어 발랐다. 모델은 거지와 노숙자, 매춘부와 알코올 중독자 등이었다. 청색으로 카사헤마스의 사후 초상화도 여러 장 만들었다. 그림 속 그의 단짝 친구는 수척하고 절절했다. 피카소의 삶은 비루했다. 그는 시간 대부분을 좁은 아파트에서 죽였다. 낮에 자고 밤에 일어났다. 외출할 땐 그놈의 청색 옷을 또 입었다. 똑바로 살지 않으니 돈도 금방 거덜 났다. 그의 그림 상당수는 작은 방을 데울 땔감으로 태워졌다. 일명 피카소의 청색시대(1901~1904)였다.

파블로 피카소, Boy with a Pipe [www.PabloPicasso.org]

"참 귀여운 고양이네요?"

1904년 여름, 한 여성이 피카소를 향해 미소 지었다. 피카소가 길 잃은 고양이를 안고 몽마르트 작업실에 들어갈 때였다. 큰 키와 풍성한 머릿결, 크고 맑은 눈을 가진 여인이었다. 이름은 페르낭드 올리비에였다. 피카소는 올리비에에게 첫눈에 반했다. 둘은 그 고양이 덕에 친해졌다. 피카소 작업실에 올리비에가 찾아와 짐을 풀 만큼 가까워졌다. 올리비에는 대체로 쾌활했다. 피카소는 그 덕에 웃는 날이 많아졌다. 그늘진 얼굴에 햇볕이 내리쬈다. 피카소의 표정처럼 그림도 차츰 밝아졌다. 붉은색과 분홍색에 자꾸 손이 갔다. 모델은 유쾌한 광대와 곡예사 등이었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 슬픈 청색을 멀리했다. 우울한 노숙자들과도 점점 거리를 뒀다. 훗날 사람들은 이를 피카소의 장미시대(1904~1906)로 명명한다. 로맨스가 모든 걸 바꾼 셈이다.

앙리 마티스, 모자를 쓴 여인
파블로 피카소, 거트루드 스타인의 초상 [www.PabloPicasso.org]

기운 차린 피카소는 열심히 나돌았다.

그쯤 피카소는 평생 친구이자 라이벌인 앙리 마티스와 마주했다. 둘은 마당발 거트루드 스타인의 아파트 'Salon 27'에서 종종 잡담을 나눴다. 피카소와 마티스는 스타인을 놓고 신경전도 했다. 사랑싸움은 아니었다. 미국 부잣집 딸인 그녀에게 잘 보여 후원금을 더 받으려고 했다. 그런 피카소가 참을 수 없는 게 있었다. 스타인 집 벽난로 위에 마티스의 그림 '모자를 쓴 여인'이 떡하니 걸려있었다. 이대로면 위험했다. "마티스 그림보다 이게 더 낫지 않소?" 스타인에게 쓱 건넨 게 '거트루드 스타인의 초상'이었다. 간결하지만 힘 있는 선이었다. 거칠지만 대범한 형태였다. 비교적 간단한 그림이나 분위기는 강렬하다. 이 그림은 피카소가 벌써 현대미술에 '감'을 잡았다는 데 핵심 증거로 쓰인다. "스타인을 전혀 닮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술렁댔다. 피카소는 너희들이 뭘 알겠느냐는 식으로 대꾸했다. "스타인은 결국 이 그림을 닮게 될걸?" 스타인도 싫지 않은 눈치였다.

앙리 마티스, 생의 기쁨

피카소는 마티스에게 한 방 먹였나 싶었다.

착각이었다. 피카소는 마티스의 '생의 기쁨'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얼간이들이야 저게 무엇이냐고 손가락질했지만, 피카소는 이 그림에서 예술의 미래를 봤다. 경이로웠다.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리나 싶었다. 피카소가 마티스를 이길 방법은 하나였다. 더 도발적일 것, 그리고 더 파격적일 것…. 피카소는 오직 이 생각뿐이었다. 절치부심하던 피카소는 우연히 마티스의 아프리카 가면을 봤다. 예술가의 본능으로 피카소를 경계했던 마티스는, 그렇게 이 야심가에게 힌트를 주고 말았다. 피카소는 온갖 이국적인 유물들이 있는 트로카데로 민족학 박물관을 쏘다녔다. 그는 청색시대 이후 잠시 잊은 스스로를 되찾았다. …그래, 나는 아예 틀 밖에서 노는 반항아였지?

입체주의 탄생…‘20세기 최고 거장’ 자리매김
파블로 피카소, Girl with Mandolin [www.PabloPicasso.org]

"우리는 당신이 회화의 미래로 보여."

피카소는 '아비뇽의 처녀들'로 모욕을 당했다. 하지만 얻은 게 있었다. 그의 도전에 경의를 표한 몇몇 화가와 추종자들이었다. 피카소는 이들과 함께 새로운 문을 열었다. 틀을 깨고 뚫은 거친 길에 발을 내디뎠다. 옛 화풍으로 돌아가는 다리는 무너뜨렸다. 피카소는 동료 화가 조르주 브라크 등과 함께 그 '바보 같은 그림'을 계속 그렸다. 피카소의 그림에는 '입체파'라는 말이 따라왔다. 마티스가 피카소와 브라크의 작품에 대해 "이거 완전, 작은 큐브(cube)들 아니야?"라고 비판한 데서 따왔다는 설이 있다. 피카소는 이제 '그림은 보이는 대로'라는 진리를 버렸다. 사물을 여러 방향에서 본 후 그 모습을 한 화폭에 표현했다. 소실점도 없었다. 원근법도 걷어차였다. 오랜 기간 사람들은 '그림을 그린다'는 말을 '대상과 똑같이, 적어도 비슷하게'라는 말로 이해했다. 피카소가 각성한 후부터 이 말은 진리의 왕좌에서 쫓겨났다. 비로소, 새로운 세계였다.

폴 세잔, 사과와 오렌지

시간은 피카소 편이었다.

1907년, 갑작스럽게 죽은 폴 세잔 회고전이 열렸다. 세잔은 계속 재평가를 받았다. 어느덧 젊은 화가들 틈에선 거의 신으로 추앙받았다. 세잔은 피카소보다 먼저 입체파의 가능성을 엿본 유일한 사람이었다. 즉, 세잔의 재평가는 곧 입체파의 재평가였다. 1900년대 초에 들어 현대 카메라의 토대가 된 제품들이 속속 등장했다. 카메라 시장도 팽창했다. 역설적으로 카메라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그림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런 그림? 당연히 입체파 그림이었다. 폴 로젠버그, 다니엘-앙리 칸바일러 등 사업가 기질의 뛰어난 화상들도 입체파 신드롬 형성에 힘을 보태줬다. 어느새 피카소는 입체파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했다. 말쑥한 외모, 쿨한 이미지에 여성 편력 등 여러 스캔들이 그를 더 주목하게 했다.

파블로 피카소, Portrait of Ambroise Vollard [www.PabloPicasso.org]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1914년께, 피카소는 이미 20세기 회화 최고 거장으로 올라섰다.

피카소는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 반항했다. 추상주의, 초현실주의 등 변화를 기치로 건 거의 모든 예술에 참여했다. "진정한 예술가는 세상에 없는 것, 새로운 무언가를 독창적으로 창조해야 한다. 의미 있는 낯선 하나를 보태야 한다." 이 신념을 실천했다. 그는 조각부터 무대 제작 등 새롭고 실험적인 분야를 망설이지 않았다.

어느 날, 한 화가가 피카소를 찾아왔다.

"계속 유치한 그림이나 그리고 있군요." 그는 피카소에게 자기가 그린 고양이 실사 그림을 내밀었다. "나는 이 정도나 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오." 피카소는 눈을 끔벅였다. 당신은 기초가 없으니 샛길로 가려고 한다, 그 행위는 현혹과 사기에 가깝다…. 그의 악담이 쏟아질 때 피카소는 턱을 괴고 스케치를 했다. "이런 그림 말이죠?" 피카소가 쓱쓱 그린 그림을 보여줬다. 그 화가가 갖고 온 고양이 그림이 똑같이 그려져있었다. 아니, 특징이 훨씬 더 잘 표현돼있었다. 이렇듯, 피카소의 반항은 정복자로서 개척 행위에 가까웠다. 부적응자의 객기 따위가 아니었다.

게르니카·한국대학살…세상에 반항하다

"파리 만국 박람회 스페인관에 걸 그림을 그려주시오."

1937년, 피카소는 스페인 정부에 작품을 의뢰받았다. 안 할 이유가 없었다. 피카소는 구상에 나섰다. 그런 그는 그 해 5월1일, 매체 '스 스와르'가 실은 사진 3장을 봤다. 그것은 학살이었다. 스페인 내전의 참상이었다. 지난 4월26일, 폭격기가 바스크 지방의 소도시를 무참히 공격했다. 그곳 이름은 게르니카였다. 폭격은 4시간가량 이어졌다. 1654명이 죽었다. 889명이 병원에 옮겨졌다. 피해자 대부분은 민간인이었다. 노인, 여자, 어린애였다.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 [www.PabloPicasso.org]

피카소는 충격과 분노, 슬픔에 휩싸였다.

그는 결심했다. 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권위주의 독재 정권, 프랑코 정권에 맞서기로 했다. 피카소는 가로 약 7m, 세로 약 4m인 캔버스 앞에 섰다. 그는 전쟁의 참상을 자기 방식대로 표현했다. 근 2개월의 작업이었다. 이 그림에는 비명만 가득하다. 거의 흰색과 검은색만 있다. 온통 무채색인 배경에선 희망의 빛줄기를 찾아볼 수 없다. 한 여인이 죽은 아이의 시신을 안은 채 절규하고 있다. 성난 황소마저 이 장면 앞에선 얌전하다. 그 밑에는 부러진 칼을 쥔 병사가 쓰러져 있다. 광기 혹은 겁에 찌든 말이 울부짖는다. 램프를 든 여인이 이 현장을 목격하고 망연자실한다. 그렇다고 돌아갈 수는 없다. 뒤에는, 분해된 듯한 또 다른 시신이 있을 뿐이다. 피카소의 그림 '게르니카'는 이렇게 탄생했다. 피카소는 붓을 통해 흙먼지로 덮여 지도에서 사라졌던 마을, 게르니카의 비극을 증언했다. 피카소는 이 그림을 만국 박람회 스페인관에 들고 갔다. 보란 듯 내걸었다.

"초등학교 4학년생이면 누구나 그릴 수 있는 인체 부분들의 잡동사니."

당시 프랑코 정권과 함께 게르니카 폭격을 도운 독일군은 이 그림을 보고 이렇게 평가했다. "이거, 당신이 한 일인가(이 그림, 당신이 그린 건가·Did you do that)?" 한 게슈타포 장교가 피카소에게 물었다. 피카소는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곤 대답했다. "당신들이 했지(그림 속 폭격은 당신들이 저질렀지·you did)."

파블로 피카소, 한국에서의 대학살 [www.PabloPicasso.org]

1944년, 피카소는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했다.

피카소는 한동안 전쟁과 평화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다만 피카소는 공산당을 '최선'이 아닌 '차악' 정도로 보고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공산당이 시키는 일에 고분고분하게 나서지 않았다. 피카소는 공산당으로부터 체제 선전용 그림 제작을 주문받았다. 그는 그들이 원하는 느낌의 그림을 그려주지 않았다. 회화부터 정권, 이제는 체제까지, 어딜 가든 끝까지 반항적이었다. 1951년, 피카소는 '한국에서의 대학살'을 그렸다.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의 장면이었다. 왼쪽에는 벌거벗은 여인과 아이들, 오른쪽에는 총칼을 겨눈 병사들이 있다. 절망감에 젖은 민간인들은 곧 학살될 터였다. 피카소는 그림 속 병사들이 미군인지, 북한군인지 밝히지 않았다. "저따위 불친절한 그림으로 무슨 체제 선전이 되겠소!" 공산당원들은 분노했다.

파블로 피카소, 스탈린 초상화

피카소는 이들을 더 열받게 했다. 문제는 그가 그린 이오시프 스탈린 초상화였다. 피카소가 원래 스탈린을 싫어했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도 굵은 선을 통해 그의 큰 야망 내지 이상을 그렸다는 설도 있다. 이러쿵저러쿵 간에 공산당원들이 볼 땐, 이 그림은 그냥 재앙 같았다.

“화가로는 비범해도, 도덕적으로는…”
파블로 피카소, The Weeping Woman [www.PabloPicasso.org]

페르낭도 올리비에, 에바 구엘, 올가 코홀로바, 마리 테레즈, 도라 마르, 프랑스와즈 질로, 자클린 로크….

피카소는 애인에게 딱히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피카소의 긴 일생을 특징짓는 또 다른 면은 그의 여성 편력이다. 피카소는 모순적이었다. 그는 늘 평화를 외쳤지만, 그의 사생활은 항상 전쟁이었다. 피카소는 유명한 바람둥이였다. 그에게 사랑은 어떻게든 변하는 감정이었다. 한 여성을 쟁취하면 곧장 다른 여성으로 눈을 돌렸다. 그래야 직성이 풀렸다. 피카소는 비루했던 시절을 함께 한 페르낭도 올리비에를 내보냈다. 32살의 피카소는 그 자리에 에바 구엘을 데려왔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은 구엘을 두고 한눈을 팔았다. 버려질까봐 결핵을 숨긴 구엘은 체념의 세월을 보내다가 결국 죽었다.

파블로 피카소, Olga in an Armchair [www.PabloPicasso.org]

그런 피카소도 결혼은 했다.

상대는 막 36살을 맞은 피카소의 세 번째 여인이었다. 댜길레프 무용단 소속의 올가 코홀로바였다. 10살 연하의 러시아 귀족이었다. 피카소는 코홀로바 가문으로 들어왔다. 첫아들 파울로도 가졌다. 피카소는 이제 한 가정의 가장이자 귀족 집안 일원이었다. 유모, 요리사, 운전사, 간호사가 딸린 호화 생활을 누렸다. 하지만 피카소는 이 생활이 슬슬 지겨웠다. 그는 자유 영혼을 다시 꺼냈다. 여기저기에 추파를 던졌다. 그 결과 부부는 싸움을 반복했다. 결국 갈라섰다. 피카소는 이혼만은 안 된다고 했다. 다른 뜻은 없었다. 이렇게 해 양육비와 재산 분할을 피하려고 했다.

파블로 피카소, Maya with her Doll [www.PabloPicasso.org]

"안녕? 내 이름은 파블로 피카소야."

피카소는 코홀로바와 찢어지기 전부터 18살의 마리 테레즈와 연애를 했다. 그의 나이는 46살이었다. "당신 초상화를 그릴 수 있을까? 나와 당신은 앞으로 굉장한 일을 할 거야." 피카소는 테레즈를 유혹했다. 이들 사이에서 딸 마하가 세상 빛을 봤다.

파블로 피카소, Dora Maar au Chat [www.PabloPicasso.org]

피카소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테레즈가 아이를 낳자 다시 바람을 피웠다. 그에게 다섯 번째가 되는 여인, 도라 마르였다. 당시 나이는 56살이었다. 피카소는 이제 마르와 동거했다. 세 번째 여인 코홀로바는 파리 한 귀퉁이에 있는 호텔 캘리포니아, 네 번째 여인 테레즈는 베르사유에서 16㎞쯤 떨어진 작은 마을에 두고서였다. 피카소는 이 시기에 게르니카를 작업했다. 시중을 든 이는 마르였다. 언젠가 테레즈가 이 모습을 보고 마르의 머리채를 잡았다. "우리 둘 중 누가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 선택해 주세요." 둘은 피카소에게 결정을 맡겼다. "선택이란 말은 질색이야." 피카소는 냉담했다. 그는 무표정한 모습으로 그림을 그렸다. 두 여인은 그런 피카소에게 질렸다. "당신은 화가로서 비범할지 모르지만, 도덕적으로는 쓰레기야." 마르는 언젠가 피카소에게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파라솔을 든 파블로 피카소가 프랑스와즈 질로 뒤를 따라가고 있다.

그런 피카소도 당한 적이 있다.

그가 만난 여섯 번째 여성, 프랑스와즈 질로는 강골이었다. 피카소는 61살 때 질로와 사귀었다. 둘의 나이 차는 38살이었다. 피카소에게도 질로는 쉽지 않은 상대였다. 자존감이 높고, 자립심도 탄탄했다. 애초 질로는 명문대 법학도에서 화가로 전향했다. 부모 반대에 대놓고 가출까지 한 상태였다. 피카소와 질로는 근 10년간 함께 살았다. 그사이 딸 클로드와 아들 팔로마가 태어났다. 천하의 피카소가 큰 파라솔을 들고 질로를 뒤따르는 사진은 지금도 유명하다. "아버지나 다른 남자친구들과는 말이 안 통하는데, 나보다 3곱절이나 연상인 당신과 대화가 된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질로도 이런 말을 남길 만큼 피카소를 각별히 여겼다. 하지만 질로는 당하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질로는 다시 쏘아다닌 피카소에게 먼저 발톱을 내보였다. 피카소의 여인 중 처음이었다. 이번에 당황한 건 피카소였다. "그 누구도 나 같은 남자에게서 떠날 수 없지!" 피카소는 의기양양했다. 강하게 대응했다. 질로 또한 꼬리를 내릴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 질로의 대답은 간결했다. "그래? 과연 그럴까?" 질로는 아이들과 함께 짐을 쌌다. 정말로 떠나갔다.

끝이 아니었다.

질로는 피카소의 사생활을 폭로했다. 책 '피카소와 함께한 삶'을 통해 자신이 겪었다는 일을 모조리 써놓았다. 피카소는 정신과 치료를 받을 만큼 굴욕감을 느꼈다. 질로는 우여곡절 끝에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다. 거기에서 보란 듯 성공했다.

창조적 파괴의 대가…‘나만의 그림’ 시대 문 열었다
파블로 피카소, Jacqueline with flowers [www.PabloPicasso.org]

피카소의 마지막 뮤즈는 자클린 로크였다.

피카소는 72살, 로크는 27살이었다. 이들은 1961년에 결혼했다. 코홀로바가 죽고 몇 년 후였다. "당신을 어제보다 더, 내일보다 덜 사랑하오." 피카소는 많은 여성에게 한 이 말을 다시 했다. 그는 로크에게 '나의 태양'으로 칭해졌다.

피카소는 노년에도 건강했다.

끝없는 바람으로 자기 삶에 대고서도 반항을 한 그는 여든 후반까지 활기가 있었다. 피카소는 말년에도 그림과 도예 작업을 이어갔다. 특히 판화에 관심을 쏟았다. 여러 실험을 했다. 그런 피카소도 아흔을 넘기자 기력이 빠졌다. 그는 1973년 4월8일, 프랑스 남부 무쟁에서 사망했다. 폐부종과 심부전 등이었다. 피카소의 죽음 소식을 들은 테레즈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나의 태양'이 사라진 후 공허하게 살던 로크도 피카소가 죽고서 13년 뒤, 그의 무덤 앞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

(왼쪽부터)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파블로 피카소, 앙드레 살몽

피카소는 어딜 가도, 무엇을 봐도 다 반항했다.

그는 반항만 한 건 아니었다. 그의 반항은 창조적 파괴였다. 그는 만신창이로 만든 현장에서 꼭 무언가를 만들거나 끌어왔다. 그는 평생 5만여점 가량 작품을 빚었다. 조각 1200점, 그림 1900점, 도자기 3200점, 드로잉 7000점, 삽화 3만점 등이었다. 피카소의 사생활을 놓고선 비난이 있을 수 있지만, 그의 예술 업적은 부정할 수 없다. 그가 앞장서 옛 화풍을 다 깨부순 덕에 세상은 현대미술 시대를 개척할 수 있었다. 그 덕에 화가들은 '똑같은 그림' 아닌 '나만의 그림'을 당당하게 그릴 수 있었다.

파블로 피카소

언젠가 한 아름다운 여인이 파리 카페에 앉아있는 피카소에게 다가갔다.

흰 바탕에 파란색 가로 줄무늬가 있는 옷차림의 피카소는 차를 홀짝였다. "피카소 선생님이시죠? 혹시 잠깐 짬을 내 저를 그려주실 수 있으세요? 값이야 당연히 지불하겠어요." 그녀는 피카소를 보고 싱긋 웃었다. "그러지요." 피카소는 단 몇 분 만에 그녀의 모습을 그려줬다. "선생님. 얼마를 내면 될까요?" 여성은 간드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사실상 휘갈긴 그림인 만큼, 지폐 몇 장이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50만 프랑(당시 약 8000만원)을 주시오." 여인은 깜짝 놀랐다. "선생님. 겨우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피카소는 그녀의 말을 끊고 대답했다. "아가씨. 내가 당신을 이렇게 그리는 실력을 얻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알아요? 장장 40년이오." 피카소가 위대한 화가로 오른 이유. 눈부신 천재성에 만족하지 않고, 수십 년간 뼈를 깎는 노력까지 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었다.

〈참고자료〉

발칙한 현대미술사, 윌 곰퍼츠, RHK

아트인문학 : 틀 밖에서 생각하는 법, 김태진, 카시오페아

〈후암동 미술관 현대미술 편 읽는 순서〉

1)“나체女에 웬 아프리카 가면?” 얼빠졌다 조롱당한 그의 ‘반전’[후암동 미술관-파블로 피카소 편] - 입체파 거장(2023. 5. 20.)

〈후암동 미술관 이론 편 읽는 순서〉

1)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 르네상스 선구자(2022. 7. 2.)

2)뻥 아냐, 600년전인데 이 정도 ‘입체 그림’ 있었다[후암동 미술관-마사초 편] - 원근법 선구자(2022. 8. 27.)

3)세계서 가장 유명한 이 ‘레이저 눈빛’, 그것은 사랑?[후암동 미술관-얀 반 에이크 편] - 유화 선구자 (2022.5.21.)

4)‘레드벨벳’도 춤추게 한 이 화가의 정체…"악마의 아들? 나 원 참" [후암동 미술관-보스 편] -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5.28.)

5)아리따운 금발 여인, 외간남자 목을 베고 있는거야?[후암동 미술관-카라바조 편] - 바로크 선구자 (2022.6.11.)

6)아름다운 여인, 끌어안고 난리난 옆 커플이 부러워[후암동 미술관-와토 편] - 로코코 선구자(2022.10.8.)

7)맨몸 여인들, 전쟁 뛰어들어 “그만!” 사자후…싸움 막았다[후암동 미술관-다비드 편] - 신고전주의 선구자 (2022.10.15.)

8)표류 D+13, 왜 몰랐지? 뗏목 위 널린 게 먹을건데[후암동 미술관-테오도르 제리코 편] - 낭만주의 선구자 (2022.5.14.)

9)“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 사실주의 선구자 (2022.5.7.)

10)“관상가 양반 아니었어?” 조선의 ‘얼굴’, 몰랐던 사실[후암동 미술관-윤두서 편] - 사실주의 특별 편 (2022. 11. 19.)

11)벌거벗은 이 여자, 뭐 때문에 빤히 쳐다보나[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2022. 4. 23.)

12)“못 그렸는데 폼만 잡아” 욕먹던 이 그림, 3300억이요? [후암동 미술관-클로드 모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⑵ (2022.4.30.)

13)‘점투성이’ 수상한 커플 정체는? [후암동 미술관-조르주 쇠라 편] - 신인상주의 선구자 (2022. 6. 25.)

14)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 표현주의 선구자 (2022.6.4.)

15)이 ‘사과’ 때문에 세상이 뒤집혔다, 도대체 왜?[후암동 미술관-폴 세잔 편] - 근대 회화 선구자(2022. 7.9.)

16)‘생각하는 사람’ 진짜 정체, 남모를 사정도 있었다[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로댕 편] - 근대 조각 선구자 (2022. 10. 22.)

17)화끈한 키스, ‘이 여성’ 사르르 녹아내리다[후암동 미술관-구스타프 클림트 편] - 분리파 선구자 (2022. 8. 13.)

18)나체 여인, 어쩌다 사자 득실대는 정글 한복판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루소 편] - 근대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 7. 30.)

19)헐크색 피부 갖게 된 ‘이 여성’…이 놈의 ‘남편’ 때문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마티스 편] - 야수주의 선구자 (2022. 7. 16.)

20)잘생긴 법학 교수님, ‘이것’ 그렸더니 미술계 '발칵'[후암동 미술관-바실리 칸딘스키 편] - 추상회화 선구자 (2022.7. 23.)

21)“이건 나도 그리겠다!” 1순위 그림, 그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몬드리안 편] - 추상회화 선구자⑵ (2022. 8. 6.)

22)스파게티 면발? 1315억에 팔린 그림, 충격적 이유[후암동 미술관-잭슨 폴록 편] - 액션페인팅 선구자 (2022. 10. 29.)

23)몸 좋은 보디빌더, 거대 막대사탕 들고 ‘의문의 포즈’[후암동 미술관-리처드 해밀턴 편] - 팝아트 선구자 (2022.11.12.)

24)“동양서 ‘테러리스트’가 왔다” 피아노 다 때려부쉈다[후암동 미술관-백남준 편] - 비디오 아트 선구자 (2022.11.26.)

〈후암동 미술관 인물 편 읽는 순서〉

1)“이런 나체화는 뒷골목에 내걸어!” 꼬장한 천재 모욕한 자 최후는[후암동 미술관-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편] - 신의 예술가 (2023. 4. 7.)

2)“12살 어린 빵집女와 몰래 연애를?” 소름돋은 목격자, ‘증거인멸’해줬다[후암동 미술관-라파엘로 산치오 편] - 모든 화가의 왕자 (2023. 4. 15.)

3)“성폭행 피해자는 나야!” 고문도 견딘 그녀…복수는 우아했다[후암동 미술관-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편] - 영원한 복수자 (2023. 1. 28.)

4)“예쁜 내 금발 공주님”…‘딸바보’ 국왕 눈에선 꿀이 뚝뚝[후암동 미술관-디에고 벨라스케스 편] - 고결한 관찰자 (2023. 2. 24.)

5)“아내·자식·명예 다 잃었다”…그런데 왜 ‘빵’ 터지셨어요[후암동 미술관-렘브란트 편] - 빛의 마술사 (2023. 1. 7.)

6)‘이 그림’ 때문에 화형당할뻔…어느 야심가의 기구한 삶[후암동 미술관-프란시스코 고야 편] - 흑화한 사상가 (2023. 2. 4.)

7)“날 잊지마오” 가시덤불 ‘감옥’ 8년 갇혔다…그림에 펑펑 울었다[후암동 미술관-추사 김정희 편] - 조선의 품격 (2023. 3. 11.)

8)“6년 약혼女두고 바람…죽자 묘지까지 파헤쳤다” 이 남자, 변명 들어보니[후암동 미술관-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편] - 위험한 사랑꾼 (2023. 3. 18.)

9)“죄송해요, 엄마가 너무 싫어요” 효자 아니었어?…이 화가의 ‘반전’[후암동 미술관-제임스 휘슬러 편] - 모던한 이방인 (2023. 3. 4.)

10)“14살 소녀 이따위로 만들었어?” 평생 먹을 욕 다 먹었다[후암동 미술관-에드가 드가 편] - 무희의 화가 (2023. 3. 25.)

11)‘미녀 그리기’에 진심이었던 이 화가, 진짜 이유[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르누아르 편] - 행복을 그린 화가 (2022. 12. 24.)

12)“고갱 그놈, 도대체 왜 그래?” 악마인지 ‘악마의 재능’인지[후암동 미술관-폴 고갱 편] - 고귀한 야만인 (2022. 12. 3.)

13)“나랑 6년 계약해” 유명 女배우의 파격제안…인생 달라졌다[후암동 미술관-알폰스 무하 편] -체코의 긍지 (2023. 2. 18.)

14)“백번은 넘게 봤겠다” 모두 아는 ‘이 절규’의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에드바르 뭉크 편] - 노르웨이의 현자 (2022. 12. 31.)

15)“이놈의 짧은 다리 때문에” 카바레 스타의 영광과 몰락[후암동 미술관-툴루즈 로트레크 편] - 작은 거인 (2022. 12. 17.)

16)“로댕 아이를 뱄다” 폭탄선언 여성, 30년 수용소에 갇혔다[후암동 미술관-카미유 클로델 편] - 천재와 맞선 천재 (2022. 11. 5.)

17)눈동자 없는 기괴한 여자 그림, 알고 보니[후암동 미술관-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편] - 파리의 귀공자 (2022. 12. 10.)

18)숨참고 키스 다이브!…아내가 그렇게 좋으셨어요[후암동 미술관-마르크 샤갈 편] - 순수한 방랑자 (2023. 2. 11.)

19)“당신은 저질 누드화가야!” 격분한 판사, 면전서 그림 불태웠다[후암동 미술관-에곤 실레 편] - 영원한 아이 (2023. 4. 1.)

20)당신은 모르실거야, 키스하는 두 사람 왜 이 꼴인지[후암동 미술관-르네 마그리트 편] - ‘진짜’ 괴짜 (2022. 9. 3.)

21)피카소도 ‘이 그림’에 “대박!” 감탄, 각성했다는데[후암동 미술관-피카소·마티스 편] - 피·마 대전 (2022. 9. 10.)

22)3번 유산·35번 수술의 악몽…그럼에도, 인생이여 만세[후암동 미술관-프리다 칼로 편] - 고통의 여왕 (2023. 1. 14.)

23)“내 천사여” 편지 사방팔방에 ‘뽀뽀’…한 무연고자의 죽음[후암동 미술관-이중섭 편] - 아고리, 나의 아고리 (2023. 1. 21.)

24)권총도 채찍도 버텼는데, ‘이 남자’ 행동에 무너졌다[후암동 미술관-마리나 아브라모비치 편] - 우아한 전사 (2022. 8. 20.)

〈후암동 미술관 현장 편 읽는 순서〉

1)이건희 컬렉션, 이 ‘다섯 작품’ 놓치지 마시라[후암동 미술관-‘어느 수집가의 초대’ 출장 편] - 전시 특집 (2022. 6. 18.)

2)알코올 중독 ‘이 남자’, ‘파리’에 미치자 놀라운 일 터졌다[후암동 미술관-몽마르트 언덕 편] - 동행자 : 모리스 위트릴로 (2022. 9. 17.)

3)고흐 “슬픔은 왜 나한테만” 펑펑 울었다, 고작 2평 다락방에서[후암동 미술관-오베르 편] - 동행자 : 빈센트 반 고흐 (2022 9. 24.)

4)모네 “앞이 안 보여도 상관없어”…백내장도 못 막은 그의 ‘최후작’[후암동 미술관-지베르니 편] - 동행자 : 클로드 모네 (2022. 10.1.)

yul@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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