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허점 노린 탐욕 추구 만연
도덕적 일탈이 관행으로 고착화
韓금융당국 ‘세계최강’ 권한 불구
제 역할 못해…가계빚 위기 초래
고대국가의 기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게 율령(律令) 즉 법이다. 제자백가(諸子百家) 가운데 법에 기반한 국가시스템을 주장한 것이 법가다. 법가의 시작으로 제나라 환공(桓公) 때 재상 관중(管仲)을 꼽는 견해가 많다. 관중은 국가시스템의 기본을 ‘예의염치’(禮義廉恥)라는 ‘네 가지 벼리(四維)’로 요약했다. 관중은 예의염치를 절도를 넘지 않고(禮不踰節), 제멋대로 나가지 않으며(義不自進), 잘못을 은폐하지 않고(廉不蔽惡), 그릇된 것을 따르지 않음(恥不從枉)이라고 설명한다.
관자는 이 넷 가운데 ‘하나가 부족하면 나라가 기울고(傾) 둘이 끊어지면 나라가 위태로우며(危), 셋이 없으면 나라가 뒤집어지고(覆) 넷이 모두 무너지면 나라가 망(滅)한다’고 했다. 그러면 사유가 왜, 어떻게 흔들리는 것일까? 관중은 ‘상벌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백성들이 따르게 할 수 없다’(償罰不信 則民無取)고 했다. 법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면 사유는 흔들릴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법이 정교하지 못하고 위법으로 얻는 이익이 처벌로 인한 손해보다 훨씬 크면 굳이 법을 지킬 이유가 없게 된다.
금융·자본시장과 관련된 각종 사고들이 잇따르고 있다. 내놓고 법을 위반한 듯한 사례도 있고 교묘하게 법망을 피하려는 경우도 발견된다. 법을 어겨도 처벌이 미약하고, 법령이 애매해 단속이 어려운 점도 십분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금융·자본시장관련 범죄는 일단 발생하면 다수에 피해를 입히고 원상회복도 어려워 심각하게 다뤄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금융·자본시장관련 규제를 담당하는 금융위·금감원은 전세계적으로 가장 막강한 권한을 가졌지만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듯하다.
올 3월 하이브와의 에스엠 인수경쟁 과정에서 카카오는 두 가지 의혹에 휩싸였다. 하이브의 공개매수 기간 동안 대규모로 주식을 매집해 주가를 공개매수가 이상으로 끌어올렸다는 의혹과 카카오의 공개매수 기간 동안 기타법인이 대규모로 주식을 매집한 의혹이다. 각각 자본시장법에서 금지하는 시세조종(176조3항)과 공개매수에 의하지 아니한 매수(140조)에 해당할 수 있다. 기타법인과 카카오의 특수관계까지 입증되면 주식대량보유 공시의무(자본시장법 171조)도 위반한 게 된다.
시세조종에 대한 벌칙은 1년 이상 징역 또는 3~5배의 손실보상이다. 140조 위반은 3년 이하 징역 또는 1억원 이하 벌금이다. 171조를 위반하면 5년 이하의 징역이나 2억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다. 카카오 측은 무혐의를 주장하지만 법원이 관련자 구속을 허용한 점을 볼 때 위법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한다. 관건은 그룹 총수인 김범수 카카오 미래이니셔티브센터장의 책임 여부다. 치열했던 에스엠 인수전 당시를 떠올려 보면 김 센터장이 주요 의사결정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카카오는 지난 몇 년간 자본시장의 혜택과 금융당국의 배려를 가장 크게 누린 기업집단이다. 계열사들을 대거 상장시켜 엄청난 자금을 모았고, 인터넷전문은행 특례법에 의해 국내 최초로 은행을 지배하는 대기업집단이 됐다. 하지만 상장 직후 일부 경영진의 ‘먹튀성’ 주식매입선택권 행사로 구설에 올랐고 이번에는 위법 의혹까지 불거지며 시장을 실망시켰다. 금융관련 법령 위반행위가 법원에서 최종적으로 인정된다면 카카오뱅크나 카카오페이 같은 금융회사를 경영할 자격을 박탈당할 수도 있다.
메리츠증권은 이화전기 거래정지 직전 보유지분을 판 건으로 구설에 올랐다. 하지만 내부정보 이용 여부를 떠나 투자구조 자체가 너무 교묘하다. 메리츠증권은 이화전기와 계열사인 이트론의 ‘무보증’ 신주인수권사채(BW)를 인수하면서 담보를 잡았다. 대신 발행회사(특수관계인)는 매도청구권(call option)을 이용해 발행된 BW의 60%를 되살 수 있는 구조다. 지분율이 낮은 최대주주가 차입 형태로 지분을 높일 수 있는 구조다. 사실상 최대주주를 대상으로 한 신주발행이다.
상법(418조) 상 주주 이외의 자에게 신주를 발행할 때는 신기술의 도입, 재무구조의 개선 등 회사의 경영상 목적을 위해 필요한 경우로 제한된다. 이화전기가 BW 발행으로 확보한 자금을 메리츠증권에 담보로 제공했다면 상법상 목적과는 다르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상법을 어겨 최대주주가 이익을 얻었다고 해도 처벌의 대상은 발행회사 경영진이다. 메리츠증권은 자본시장법 상 불건전 영업행위(71조7)로 처벌받을 수도 있지만 그 수위가 1억원 이하의 과태료에 불과하다.
고도의 투자기법으로 포장된 투자자 기망 행위는 메리츠 증권 뿐 아니다. 라임펀드 사태 때도 전환사채(CB)를 활용한 눈속임이 이뤄졌다. 느슨한 규제 헛점을 노린 사모펀드 불완전판매 사태도 있었다. 올해 불거진 차액결제거래(CFD)를 이용한 주가조작 의혹도 법과 감시망이 허술한 틈에 이른바 ‘선수’들이 시장을 농락한 사례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외국계 금융회사의 불법 공매도 역시 솜방망이 처벌과 사법권의 한계로 인해 근절되지 않고 있다. 법이 무섭지 않으니 불법이 횡행하는 모습이다.
김지완 전 BNK금융 회장은 재직 중이던 2018년 4월 계열사인 BNK자산운용이 만든 사모펀드를 통해 당시 아들이 일하던 핀테크업체에 80억원을 투자했는 의혹을 받고 있다. 김 전 회장은 아들이 한양증권으로 옮긴 후에는 BNK금융 계열사의 채권발행 물량도 대량으로 몰아준 것으로 알려졌다. 김 회장은 무려 45년간 금융권에서 근무했고 그 중 25년간 최고경영자를 지낸 인물이다. 그의 일탈은 금융권의 잘못된 관행이 얼마나 뿌리가 깊은 지 말해준다.
김진영 하이투자증권 부동산부문 사장이 15조원 규모의 기업어음 거래를 자신의 아들이 중개인(broker)으로 근무하는 흥국증권에 몰아준 의혹이 제기된 것도 사례 가운데 하나다. 사실이라면 김 사장의 아들은 엄청난 성과급을 챙겼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법조인이나 정부 관료가 퇴직 후 ‘전관예우’를 누리는 것 같은 관행이 금융권에도 존재한다. 은행에 근무하다 증권사나 운용사로 옮긴 후 전 직장으로부터 채권발행이나 인수 관련 특혜를 받는 사례다. 하지만 처벌이 쉽지 않다.
자본시장법 35조는 대주주와 특수관계인의 부당한 영향력 행사를 금지한다. 거래관련 부당한 영향력은 금리, 수수료, 담보 등에 있어 통상적인 거래조건과 다른 조건으로 대주주 자신이나 제3자와의 거래를 요구하는 행위로 제한된다. 그런데 사모펀드 투자나 채권발행 등은 대부분 장외시장에서 이뤄진다. 투자기준이나 가격이 모호해 거래여부는 담당자의 재량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일감을 몰아줘도 통상적인 거래 조건이었다면 문제 삼기 어렵다. 형법상 배임죄를 적용하려 해도 마찬가지다.
경제위기는 대부분 금융위기 형태로 나타난다. 금융관련 사고는 경제적 파장이 크다. 이 때문에 다른 분야와 달리 금융은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에 상당한 권한을 갖도록 법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시행령과 행정규칙만으로도 금융회사와 금융인들에 치명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권한이 많고 강한 만큼 예방적 규제에 대한 책임도 크다. 하지만 최근 자본시장이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 금융당국의 예방적 규제는 제대로 이뤄졌다고 보기 어렵다.
저금리와 부동산 호황을 틈타 증권사들이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에 탐욕적으로 뛰어드는 상황을 방치했다. 후순위 중심의 해외부동산 투자 열풍에도 제동을 걸지 못했다. 공모가를 부풀려 투자자들을 기망하는 기업공개(IPO)도 사실상 방관해왔다. 부동산PF와 해외부동산 투자, 공모가 부풀리기로 일부 관계자들은 떼돈을 벌었지만 뒤이어 터진 부실의 부담은 다수의 투자자들이 떠안게 됐다.
금융당국은 업계의 잘못된 행보를 막지 못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도 그릇된 길을 걸어왔다. 통상 은행에 대한 감독권한은 독립성이 인정되는 중앙은행이 갖지만 우리나라는 정부조직인 금융위원회에 있다.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은행·증권·보험감독을 금융감독위원회(현재 금융위원회)로 통합하면서다. 외환위기 극복 후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는 주요국 가운데 1위가 됐다. 자타공인 우리 경제의 아킬레스건이다. 가계 빚을 줄여야 한다는 경고가 쏟아지고 있다. 정부가 금융위를 통해 은행 돈을 마구 푼 결과가 오늘날의 가계 빚 문제를 초래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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