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장재에서 상품을 제외한 빈 공간을 전체 대비 50% 이하로 제한하는 ‘일회용 수송 포장 방법 기준’에 벗어나는 택배. 주소현 기자 |
[헤럴드경제=주소현 기자] [Web발신] 1박스 문 앞(으)로 배송했습니다
지난 7일 퇴근 후 도착한 택배를 보고 처음 든 생각은 ‘의아함’이었습니다. 구입한 상품은 200㎖ 들이 로션 하나인데 문 앞에 놓인 건 마대자루 같은 비닐 봉투였습니다. 순간 뭘 주문했는지 헷갈릴 지경이었습니다.
택배 뜯어보니 나온 건 가로 8㎝, 세로 18㎝, 높이 4㎝의 로션 상자. 이 상자가 들어있던 봉투의 크기는 가로 40㎝, 세로는 70㎝가 넘습니다. 이 봉투는 같은 상품이 스무 개는 들어갈 법한 크기입니다.
적어도 2026년 5월까지는 이런 황당한 택배를 받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포장재 대비 상품의 부피와 포장 횟수를 제한하는 이른바 ‘택배 과대포장 규제’에 2년의 계도 기간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현장 여건에 따라 유통업계가 자율적으로 포장재 쓰레기를 줄이도록 지원하겠다는 게 환경부의 설명인데, 현실은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포장재에서 상품을 제외한 빈 공간을 전체 대비 50% 이하로 제한하는 ‘일회용 수송 포장 방법 기준’에 벗어나는 택배. 주소현 기자 |
환경부는 7일 ‘일회용 수송 포장 방법 기준’에 계도기간을 2년 간 운영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위반 시 과태료 300만원을 물어야 할 시점이 오는 4월 30일에서 2026년 4월 30일 이후로 2년 미뤄졌습니다.
일회용 수송 포장 방법 기준은 포장횟수는 1회 이내로, 포장공간비율은 50% 이하로 제한하는 내용입니다.
과대포장을 제한하는 포장재질·포장방법에 관한 기준은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여기 택배가 포함된 건 2022년 4월입니다. 당시 코로나19로 택배 물량이 폭증하면서 쓰레기를 줄이자는 국민적 여론이 반영된 거죠.
[네이버 블로그 캡처] |
법을 개정하고 2년 뒤부터 시행되는 규제인데, 계도 기간이 2년 더 필요한 이유는 뭘까요? 유통업계는 포장재 종류를 한번에 늘리기 어렵다는 점을 듭니다.
환경부에 따르면 잠정적 규제 대상은 유통업체는 약 132만 군데, 제품 종류 1000만 개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이에 비해 포장재 규격은 10종 안팎으로, 제각기 부피가 다른 제품에 맞춰 포장재를 마련할 준비가 안 돼 있다는 겁니다.
또 완충재나 보냉재가 제한되면 상품이 파손되고, 특히 음식물 등은 상할 우려가 있다고도 합니다.
[블라인드 캡처] |
그러나 택배 과대포장 규제는 다른 품목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헐거운 편입니다. 이미 과대포장 규제를 받고 있는 가공식품, 음료, 주류, 건강기능식품, 화장품, 의약외품, 의류, 전자제품 등의 포장공간비율은 10~35%입니다.
택배의 포장공간비율은 50%이니 수송 과정에서 상품이 파손될 우려를 충분히 감안해서 기준을 마련한 셈입니다. 환경부 자원순환정책과에서 “택배 포장공간비율은 50%로 이미 보냉재나 포장재를 쓸 수 있는 공간을 충분히 줬다”고 설명할 정도입니다.
택배 상자 쓰레기. 주소현 기자 |
택배 과대포장 규제가 예정된 원안대로 시행되지 않을 거라는 환경부의 시그널은 지난달부터 감지됐습니다. 제도 시행이 다가오는 데도 세부 사항을 내놓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적용 예외 대상이 속속 등장했습니다.
먼저 환경부는 지난달 13일 보냉재는 제품의 일부로 보고 포장공간비율에 포함시키지 않겠다고 밝혔습니다. 이렇게 되면 포장재보다 턱없이 작은 상품이더라도 빈 공간 없이 보냉재로 꽉 채운다면 과대포장이 아니게 됩니다. 혹은 상품과 보냉재의 부피만큼 빈 공간이 생겨도 규제에 걸리지 않습니다.
이어 지난달 21일 열린 유통업계와 임원진급 간담회 이후 업계 요청에 따라 환경부는 포장공간비율을 적용하지 않거나 유연하게 적용할 사안을 검토했습니다. 길이가 길거나 납작한 제품, 종이 완충재, 도난 및 파손 등을 위한 포장재 및 선물용 포장을 요청하는 경우 등입니다.
이번 환경부의 발표에는 연 매출 500억원 이하 유통업체까지 미적용 대상에 포함됐습니다. 이들이 처리하는 택배 물량이 10% 미만에 불과해 영세한 유통업체들이 짊어질 부담에 비해 포장재 쓰레기가 줄어드는 효과가 적다는 이유입니다.
이외에도 개인끼리 보내거나 해외에서 직구하는 택배도 규제 대상에서 빠졌습니다.
택배 하차 중인 모습. 주소현 기자 |
이런 저런 사정을 다 고려하고 나니 규제 자체가 유명무실해졌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박정음 서울환경연합 자원순환팀장은 “예외 사항을 둠으로써 택배 과대포장 규제에 큰 허점이 생겼다”며 “환경부가 택배 과대포장 규제에 대한 이해가 있는지, 시행할 의지가 있는 건지 의문이 든다”고 꼬집었습니다.
이어 “지난해 일회용품 규제부터 환경부는 시행을 앞두고 계도 기간을 두는 방식으로 사문화하고 있다”며 “업계 자율에 맡기는 건 환경부의 역할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고도 했습니다.
addressh@heraldcorp.com